엔트로피가 증가할수록 대상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진다. 잘 만들어진 유리컵을 생각해보자. 아무 손상이 없는 유리컵은 보고 있지 않아도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다. 평소와 같이 내가 아는 그 모습으로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잘 놓여있을 것이다. 반면 산산조각이 난 유리컵은 보고 있지 않으면 그 많은 파편들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예측할 수 없다. 그 조각이 더욱 쪼개져 양자 수준까지 작아진다면, 내가 유리조각이 어디 있는지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유리조각의 위치는 변하게 된다. 결국 유리조각의 잔상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지금 그 유리조각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세상 어떤 것도 10년 뒤, 50년 뒤의 미래를 쉽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나와 너의 관계도 그렇다. 너와 내가 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르는 사이라면, 내일도, 모레도, 먼 훗날에도 그저 모르는 사람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일생에서 모르고 지내는 사람만 수십억 명이니, 네가 그중 한 사람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어떠한 힘에 의해서 하필 너와 내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된다면, 그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고,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저 서로 이름만 알고 말 몇 마디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관계의 앞날은 예측하기 조금 어려워진다. 당장 가까운 미래에는 지금과 같이 말 몇 번만 섞는 관계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상호작용이 계속 이어지다가 또 다른 변수가 생기면,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은 그 이상 관계를 이끌어갈 특별한 계기 없이 서로 잊히게 된다. 나와 너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는 한, '이러다 말겠지'하며 둘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 적은 가능성으로 관계를 계속 이어갈 계기나 관심이 생겨 한층 더 자주 보게 되는 단계가 되면, 이 관계의 불확실성은 더욱 올라간다. 인생에 둘도 없는 친구로 남을 수도 있고, 원수 사이로 남을 수도 있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겠지'라는 다짐과 예측을 할 수는 있어도, 앞으로 일어날 나와 네 사이에서 일어날 변수들은 그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다.
이처럼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 사이의 변수는 증가하고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겉으로는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관계의 변화가 다양하게 일어난다. 좋은 관계라도 다양한 모양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끝은 대부분 이별이다. 너와 나를 이어왔던 그 특별한 힘은 어느새 시들해지고 관계는 소원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락 한 번 하는 게 어색한 사이가 되고, 오랜만에 '반갑다!' 하는 문자를 보내는 것도 용기와 결단이 필요해진다. SNS를 통해서 네가 요즘 무얼 하는지 알 수는 있어도, 바로 지금은 밥을 먹는지, 잠깐 쉬고 있는지, 일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SNS에서 보이는 네 모습도 결국 과거의 잔상일 뿐이다. 너와 나를 다시 잇게 하려면 어쩌면 처음 만난 그날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럴 힘이 너와 내게 남아있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우리 사이의 불확실성은 늘어나지 않는다.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겠다. 평생 불확실한 서로의 상태만이 남는다.
이 우주의 끝은 엔트로피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 상태란다. 두 사람의 관계를 빗대어 보면, 그 관계 하나하나가 작은 우주처럼 느껴진다. 빅뱅 같은 처음과 삭막한 끝이 존재하는 짧은 우주.
나는 과학 분야 전공자가 아니다. 거창하게 엔트로피와 인간관계를 엮어봤지만, 그 둘 다 제대로 알지도, 다루지도 못한다. 그러나 '영화 평론가만 영화를 논하지 않듯, 과학 이야기도 대중들에게 더욱 친숙해지면 좋겠다'라고 말한 어느 과학자의 말에 동의한다. 학술로써 사실과 아닌 것을 구별하는 과정은 그들에게 맡기고, 그 영역 밖에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각자의 의미를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