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쉽고 멋진 세계여행' 출간 뒷 이야기
중학교 2학년 가을. 담인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방으로 불렀다.
당시의 선생님은 참 젋었다. 동네에서 같이 농구 게임도 많이하고, 학교에서도 친근한 형처럼 참 잘 챙겨주셨다. 게다가 당시 주변에는 유일하게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서 굉장한 얼리어답터였다. 그래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른다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난 여느 부산의 중학생처럼 선생님을 퉁명스럽게 대했다.
"재원아 니는 장래희망이 뭐고?"
"장래희망이 뭔데요?"
"야이 무식한 놈아. 장래희망도 모르나."
"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던지 그런거 있잖아."
"아.. 네"
"음.. 그럼 저는 나중에 작가 될랍니다."
"뭐. 작가?"
"네. 작가요."
"왜 안됩니까?"
"야 인마. 니 작가가 뭔 줄은 아나?"
"그리고 니 작가 될라카믄 지금 학교에 있으면 안 된다!"
"그라문요?"
"작가가 될라문 인마. 지금 당장 학교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된다."
"그래야 작가가 될 수 있는 기라."
"쌤요.. 그 말 진짭니까?"
"마. 당연하지!"
그때 왜 갑자기 입에서 '작가'란 단어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유를 고민할 틈도 없이 작가란 장래희망은 생긴 지 단 5초 만에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내겐 용기가 없었다. 당시에 누가 가출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누군가 전국을 떠돌아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는 방법은 15살의 소년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랗고 상상하기 무서운 세계였다. 그리곤 내 친구들이 모두 그랬듯 나 역시 평범한 중,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직장인이 되고 나서 참 떠돌아다닐 일이 많았다. 첫 회사는 중소기업이었는데 근무도 힘들도 친구들이 다니는 대기업이 부러웠다. 그래서 일 년 만에 회사를 나와 어렵게 대기업에 입사했다. 살아남기 위해 밤 낮 없이 일을 했는데, 그래도 꽤나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 칭찬받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꿈과 관련도 없는 일에 인생을 쏟아붓는 나 자신이 점점 못마땅했다. 그러다 대리 진급을 앞두고 음악을 만드는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음악 회사에서 음악을 만들고, 팬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정말이지 매력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줄어든 월급이 문제였다. 주말도 없이 일하는 탓에 다른 부업은 꿈도 못 꾸고, 학생 때 해외여행 다닐 때 해봤던 룸 셰어를 떠올렸다. 에어비앤비 그것이 내 인생 첫 부업이었다. 부업도 직장이라면 졸업 후 네 번째 직업이었다.
처음에는 푼돈이라도 벌어볼 거라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점점 꽤나 재미있는 일이 되었다. 돈도 돈이지만, 매일 퇴근해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친구들과의 함께하는 일상이 여행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말도 없이 일하는 처지 때문에 어디 멀리는 갈 수는 없고, 집 주변인 합정, 망원, 상수를 발이 닳도록 놀러 다녔다. 일터를 오래 떠날 수 없는 내게 그들과의 짧은 동네 마실은 최고의 일탈이자 여행이었다. 베를린 친구와 망원동을 걸으면 그곳이 베를린 같았고, 스페인 친구와 상수를 걸으면 그곳이 바르셀로나 같았고, 프랑스 친구들과 한강을 거닐 때면 이곳이 센 강 같았다. 그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나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남자 주인공 '길'처럼 본격적인 착각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주머니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점점 내가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 마법 같은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해온 내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 일기장처럼 '합정동 워킹홀리데이'라는 블로그를 써나 갔다. 새로운 일도 하고, 퇴근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이 마치 친구들에게 들은 워킹홀리데이 같았기 때문이다.
고화질 사진이나 화려한 태그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순전히 기록을 목적으로 지난날들을 채워갔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블로그에는 조금씩 많은 사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종종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잘 보고 있다며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들의 응원이 정말 큰 힘을 주었다. 그 힘으로 계속 적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글이 재미있다며 책으로 내어보라고 권유를 해왔다. 그런데 참 믿기지 않게도 내 이야기를 좋게 봐주신 출판사를 통해서 블로그의 글이 정말로 책이 되었다. 이토록 작은 지역, 이토록 우리와 가까운 동네에 대해 여행 책을 쓴 사람은 없을 텐지만 제목은 역설적으로 멋있게 지었다. '이토록 쉽고 멋진 세계여행'. 자신의 동네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사람 여행을 한 평범한 삼십 대 자취남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는 여행 작가가 되었다.
당시에는 전혀 이해 못했지만, 17년이 지나 그때의 담임 선생님 나이가 되고서야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가 됐다. 무언가 열심히 떠돌아다니고 기록했더니 정말 작가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겁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세상 이치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작가가 되려면, 지금 당장 학교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되!"
사실 책을 한 권 냈다고 내가 작가가 된 것은 아니다.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다양한 즐거움을 경험하고, 기록하는 행위로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개인적인 큰 수확이다. 인생의 방향을 조금 정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5년 남짓 직장생활 안에서 '욕망'을 쫓았다면, 앞으로는 직장밖에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여행'을 발굴하려 한다. 그래서 많은 직장인들이 일상에서 짧은 착각 여행을 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사는 것에 좀 숨통이 트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보다 또 즐거운 일이 있을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내 여정의 기록을 책으로 낼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꼭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보려 한다.
"쌤. 저 골통인 줄 아셨죠? 근데 진짜 작가 됐습니다이.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