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여행, 일상 여행의 실험
[ Intro ]
늘 한 번 머물러 보고 싶었던 부암동.
그 욕심을 채우러 배낭을 쌌습니다.
도시 여행자 감성을 듬뿍 담아, 팍팍한 일상은 잠시 덮어두고
여행의 시작은 을지로 입구역입니다.
이곳에서 내려서 일반 버스로 15분만 이동하면 바로바로
서울의 숨겨진 보석 '부암동'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익숙하디 익숙한 이 지하철역은 오늘따라
해리포터의 9와 4분의 3번 승강장처럼 보입니다.
부암동으로 가는 길에 생각보다 많은 학교들이 있더군요.
하교하는 학생들이 우르르 타더니,
몇 정거장 안 가서 마치 스쿨버스 같은 분위기가 되었어요.
정말 해리포터의 마법학교에 가는 기분이었죠.
무엇을 해도 까르르 웃는 해맑은 중학생들과 함께 열심히도 언덕을 달렸습니다.
그렇게 15분쯤 지나자 목적지인 자하문고개역에 다다랐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앞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문학관의 담백하고 무게감 있는 회색 건물의 분위기가
앞으로 펼쳐질 1박 2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틀 전에 예약하기는 했지만,
나름 숙달된 도시여행자의 솜씨로 고심해서 고른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윤동주 문학관이 있던 자하문고개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Kim's Guest House 였죠.
참고로 제가 도시여행을 하며 숙소를 고를 때 기준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로컬이 운영하는가?
2. 집에 soul이 담겨 있는가?
3. 적정 가격인가?
Kim's Guest House는 이 모든 걸 충족시켜주는 곳이었죠.
아기자기한 페브릭과 먼지 한톨 없이 깨끗한 바닥과 주방이 아늑함을 주었습니다.
처음 머물러 보는 여행지에서는 숙소가 정말 중요한데요.
이날도 역시 성공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자기 철학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시는 주인분도 멋있었습니다.
편안한 침대에 잠시 잠을 청했다가
눈을 떴더니 이미 해는 저 멀리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어요.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석양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던 터여서 조금 아쉬웠지만, 여행이 뭐 그렇죠
계획은 늘 틀어집니다 ㅎㅎ
석양은 없었지만 어슴푸레한 저녁 하늘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좋았어요.
느긋하게 산책을 시작했어요.
여기저기서 동네 분들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모습도 정겹고,
동네에 이렇게 시인의 언덕이 있다는 것도 왠지 로맨틱했어요.
그다음은 느낌이 가는 대로 동네를 훑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동네를 여행할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죠.
그 유명하다는 클럽 에스프레소도 서성거려보고,
북악 스카이웨이를 싱싱 달리는 멋진 라이더들 사이로
튼튼한 두 다리로 산책을 하기도 했죠.
혼자 하는 여행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며
내 발 닫는 대로 부암동을 즐깁니다.
클럽 에스프레소 중심으로 형성된 언덕의 윗동네(?) 체험을 마치고,
자연스레 아랫동네 산책에 나섰습니다.
창의문로 5길이라고 표시된 작은 골목에 뭔가 재미있는 것들이 있어 보였습니다.
작은 빈티지 샵, 카페, 스시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어요.
하나 같이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곳들이었죠.
그렇게 조금씩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어딘가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귀를 기울여 잘 들어보니 국악 소리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분명 평일 목요일 저녁인데요..
그 인적이 드문 작은 골목에서 웬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누군가 굿을 하는 건가. 아니면 전통차 집이 있는 걸까..
궁금증이 일어 그 소리를 따라 가보았습니다.
순간 정말 여행을 온 것 같았죠.
'얼씨구!'
아리랑과 시나위 공연이 한창인
이 의문의 장소는 '무계원'이라는 전통문화 공간이었습니다.
종로 문화재단에서 관장하고 있었죠.
그곳에서 한오백년이라는 콘서트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유튜버, 유학생들에게 한국의 전통을 소개하는 자리인 듯했습니다.
평소 국악에 관심이 많은지라
우연히 마주친 이 수준 높은 공연과 공간이 너무 반가웠습니다.
게다가 관객의 90% 이상이 외국인들이어서
마치 제가 해외여행을 와서 한국 전통 공연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콘서트의 주최 주관이 누구인지 묻기도 전에
우선 지금 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물어보고는
얼른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전통 음악/무용 공연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아무튼 여행운 만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이게 웬 횡재일까요!
국악과 전통 무용 공연이 끝나자
도포를 입은 사회자는 관객들에게 메인이벤트가 있을 예정이라며
마루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죠.
저도 무섭게 적응력을 발휘하며 외국인들 틈에 마루 한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개량 한복에 머리가 희끗한 한 분이 붓을 잡고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처음 자리를 잡고 뒷줄에 앉았을 때 바로 옆에 앉아계셨던 분이셨죠.
알고 보니 그분은 (설명하기 조심스럽지만..)
한국 문인화를 이끌어가시고 계신 화정 김무호 선생님이셨어요.
저는 부끄럽게도 그날 문인화라는 단어를 그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라이브 드로잉을 펼치는 김무호 선생님의 붓끝에
탄생하는 경이로운 세계를 넋을 놓고 보고 있었죠.
누가 외국인이고 누가 한국인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고혹한 먹 향과 눈 앞에 펼쳐지는 화려하고 강한 화폭에 무아지경을 경험했습니다.
그저 그 세계를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히 그려나가다는
화가분이 신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우연히 들린 무계원에서 너무 강력한 세계를
여행한 탓에 흥분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도 있고,
늦은 시간에 잡은 약속까지도 시간이 남아 클럽 에스프레소에 들렸습니다.
클럽 에스프레소는 꾸며지지 않은 듯 하지만 깊은 세월을 담고 있어
왠지 쿨해 보이는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모임을 하는 분들이 있었는데요.
이런 곳에서(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어려운) 모임을 하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굉장히 궁금하기도 했죠.
커피로 마음을 조금 다스린 후
인근에 사는 여행작가 박상준 님을 만났습니다.
애당초 처음부터 제게 부암동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로망을 심어주신 분인데요.
예전에 부암동에서 오래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고,
지금은 이곳에 거쳐를 옮겨 로컬로 살아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추천으로 '사이'라는 치킨 집을 찾았습니다.
시간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곳에 숙소를 잡았기에 이 시간도 아주 여유롭게 느껴집니다 ㅎ
이런 로컬 피플과의 만남은
제가 관점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인데요.
동네의 역사며, 숨겨진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서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었던 작가님과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듬뿍 나눴죠.
그 감사하고도 즐거운 자리는 치킨 집 이후로도
몇몇의 부암동 로컬 술집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랜만의 떠나온 여행 덕분에 잔뜩 신이 났던 저는
흥에 겨워 마셔대다가 그곳들을 아쉽게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네요..
몇 시에 숙소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침대에 햇빛이 들어 슬며시 눈을 떴습니다.
무거운 머리로 나무로 만든 계단을 하나 둘 올라가 보았는데요.
어라.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습니다.
누구... 사람인가요?
어라, 사람 맞습니다.
그것.. 그것도 외국인 사람!
맞습니다.
이곳은 전 세계 사람들이 서울의 고즈넉함을 찾아 여행 오는
부암동의 게스트 하우스였었습니다.
저는 그냥 집 근처에서 취했던 게 아니라 여행을 온 것이었지요!
하... 하하하... 하이^^:
굿모닝~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우리는
Kim's Guest House 대표님이 차려준 우주 최강 맛있는 한식을 뚝딱 비워내고,
햇빛 가득 담긴 따뜻한 차도 함께 나눴죠.
각각 파리와 홍콩에서 온 알렉스와 티에리였어요.
그들도 서울에서 서울로 여행 왔다는 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어요.
무릎을 치면서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면서
이제 파리의 곳곳에 머물러 보면서 여행을 해야겠다며 신나 했죠.
여행 이야기에 급격히 가까워진
알렉스와 티에리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대표님은
인근 백사실 계곡으로 가벼운 산책을 가기로 즉석 합의를 보았습니다.
너무 급작스런 계획이었지만,
뭐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3국의 남자들은 운동화로 갈아 신고
부암동 로컬이신 대표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알고 보니 이 동네에는 그 유명한 산모퉁이 카페가 있었어요.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 장소로 유명한 곳이죠.
아직 오픈 전인 카페를 뒤로 하고 우리는 동네 사람들만 다닐 것 같은
골목을 조금 더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기를 한 5분 만에 우리는 마치 비밀의 화원으로 통할 것 같은
작은 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백사실 계곡으로 통하는 길이야."
"허허. 이런 자연을 바로 집 뒤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몰라."
처음에는 그래 봐야 종로구인데,
얼마나 대 자연이 펼쳐지기 반심반의 했어요.
그.. 그런데.
한국에서 잘 보기 어려운 붉은 소나무들의 등장과 함께,
발걸음을 옮길수록 믿기 힘든 수려한 자연경관들이 펼쳐졌어요.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이곳이 서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죠.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이름이 백사실인 이곳은
1 급수에서만 산다고 하는 도롱뇽이 서식하고 있어 보존지역이기도 하다고 해요.
누가 외국인이고 관광객이랄 거 없어.
알렉스와 우리 모두는 '어메이징!!'을 연발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보존된 백사실 계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숨 막히는 백사실 계곡 트레킹이 끝나도 놀랄 일은 계속됩니다.
다시 모퉁이 카페를 지나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웬 나이 지긋한 신사분이 우리를 부릅니다.
"어이~ 손님 오셨나 봐. 들어와서 구경하고 가~"
알고 보니 그분은 모퉁이 카페에 주인분이셨어요.
아직 오픈은 안 했지만 깨끗하다며
우리 모두를 안으로 초대해주시고,
내부를 소개해주셨죠....
하마터면 영업하는 카페에서 커피도 공짜로 얻어먹을 뻔했습니다.
한국이 동네 인심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것을 이렇게 다른 동네에서 극진히 받으니 너무 감사했어요.
아마도 여행객인 우리와 로컬을 연결하는 게스트하우스 대표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죠.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백사실 계곡의 아름다움과
모퉁이 카페에서의 예쁜 추억을 뒤로하고 저는 게스트 하우스 체크 아웃을 준비했어요.
간간히 외국인 손님들과 바비큐 파티를 한다는 Kim's Guest House에서
알렉스와 티에리와 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우리는 헤어졌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그들도 헤어짐에 익숙한지.
홍콩, 파리, 서울 어디에서든 또 스치자고 서로를 쿨하게 보내줍니다.
이런 아쉬움이 있어야 여행이죠..
(그러면서도 저는 또 그들과의 주말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엄청 스케줄을 조정하였더랬지요..)
[Epilogue]
부암동 1박 2일의 여행은
평소에 너무 가보고 싶었던 환기 미술관을 마지막 목적지로 삼았어요.
오래간만에 갤러리 투어에 신이 나서 인근의 다른 갤러리들도 방문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곳에 있는 고 김환기 작가님의 작품들이 너무 좋았어서 기억에 남아요.
그분의 작품들을 통해 다시 한번 문학과 예술의 동네.
잊힌 듯 오롯이 존재하는 부암동을 느낄 수 있었어요.
갤러리, 북악 스카이웨이, 치킨,
윤동주 시인, 백사실계곡, 핸드드립 카페 등등
하나하나 말할 때마다 그 매력적에 아늑해지는 부암동.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서울 속 서울 아닌 듯한
고즈넉한 동네에서 쉬어가고 싶다면
부암동에서 하루 묵어가며 로컬처럼 여행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럼 오랜만에 도시 여행하고,
외국인 친구들 만났던 여행기 이만 줄이겠습니다.
모두 문득문득 자주자주 여행해요~~
-작은여행자 최재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