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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놀이 Jul 01. 2020

강의의 본질

캘리그라피 강의에서 학생들이 원했던 것

01 캘리그라피, 그 아름다움과의 첫 만남


2015년 4월. 전공 수업, 광고 동아리 활동, 그리고 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바쁘디 바쁜 대학교 캠퍼스 생활에 젖어있을 무렵이었다.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가는 길, 학교 게시판에 걸려있는 캘리그라피 원데이 클래스가 열린다는 포스터를 마주쳤다. 하루 2시간 만에 예쁜 캘리그라피를 손으로 있다기에 바로 휴대폰을 켜고 신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2시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그저 지나가는 이벤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캘리그라피 클래스가 열리는 날, 학교의 한 강의실로 갔더니 꽤 많은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있었다. 글씨 쓰는 법 배우겠다고 20여 명의 가까운 성인들이 모여있었다. 고작 글씨 쓰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말이다. 곧 캘리그라피를 가르쳐줄 강사님이 들어오셨고, 오늘 진행할 강의의 내용과 붓펜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첫 번째 시간은 본인이 원하는 글자를 붓펜으로 마음대로 써보는 시간이었다. 붓펜을 집어서 '사랑합니다'라는 글자를 쓰는 순간, 못생긴 글씨만이 백 도화지 위에 쓰였다. 예전부터 나름 글씨를 좀 쓴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소릴 많이 들어왔던 나였기에 조금 충격이었다. 두 번째 시간은 강사님이 붓펜 캘리그라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교(?)들을 보여주고 따라 써보는 시간이었다. 글씨의 끝을 휘날리듯 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자간의 간격이나 문장의 구성에서 어떤 글자에 힘을 줘야 하는지와 같은 작은 디테일들이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써보다 보니, 어느덧 2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02 꾸준히 연습했던 3년의 시간


캘리그라피 원데이 클래스가 끝나고, 나는 어느새 붓펜과 A4용지 500장짜리 더미를 하나 사서 매일 1시간씩 연습하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예쁘다 싶은 캘리그라피 이미지를 찾아 따라 써보고, 내 필체로도 바꿔 써보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지인들은 해봤자 얼마나 하겠냐는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는 당장 잘 쓰는 글씨는 아니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꾸준히 매일 글귀를 쓰는 그 자체가 즐거웠다. 당장 실력이 향상되는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콩나물을 기르듯 끄적이는 일 그 자체가 즐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붓펜을 넘어 딥펜을 비롯한 갖가지 필기구로 캘리그라피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펜촉과 잉크, 그리고 종이의 재질과 종류를 공부하면서 점점 내공을 쌓아갔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러, 나는 어느새 같은 과 후배의 어머니가 하시는 식당 간판에 들어갈 캘리그라피, 어느 한 공공기관에서 진행하는 홍보물의 캘리그라피와 대기업의 사내 이벤트용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고 있었다.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조금씩 쌓아온 캘리그라피 실력이 다양한 곳에서 유의미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3년 전에 캘리그라피를 시작한 나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던 지인들도 점차 작은 의뢰(?)들을 해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 3년의 캘리그라피가 다른 곳에서 좋은 영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나에게 작은 제안을 했다.


야, 그 정도로 캘리그라피를 할 실력이면 다른 사람들 가르쳐도 되겠다!






03 캘리그라피, 강의로 만들어볼까?


혼자 캘리그라피를 끄적이고 있을 무렵, 대학생을 상대로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 강의를 하고 있던 친구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그 좋은 실력을 썩히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쳐보는 건 어떻냐고. 마침 시간도 많은 때였던 터라, 솔깃했다. 한번 해볼까?


본격적으로 캘리그라피 강의를 열기 전, 다른 캘리그라피 강의들을 참고하여 어떻게 강의를 구성하고 진행할지 설정했다.


1. 일회성인 원데이 클래스보다는 수강생들의 실력 향상에 도움을 지속적으로 줄 수 있는 4주 클래스로 진행.

2.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강의로 포지셔닝.

3. 강의료는 붓펜 가격을 포함하고, 대학생이 주 수강생인 점을 감안하여 설정.

4. 강의 장소는 학교 내의 강의실을 대여해 사용.


이렇게 강의를 구성하기 위해 조건을 설정하고, 강의 커리큘럼을 짠 다음 온라인 강의 플랫폼과 대학생 커뮤니티에서 홍보를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04 그래서 네 캘리그라피 강의가 특별한 이유가 뭔데?



망했다. 강의를 홍보한 이후로, 강의를 신청한 수강생은 한 달 동안 아무도 없었다. 나름 강의 구성도 세심하게 짰고, 심심한 강의보다 재미를 위해 콘텐츠도 꽉꽉 채워서 홍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 대한 응답은 허전한 결과로 나타났다. 무엇이 문제일까.


참혹한 첫 한 달 성적표를 가지고 지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캘리그라피 실력에 자신도 있었고, 강의도 짜임새 있는 구성이었는데 왜 신청자가 아무도 없는지 모르겠다며 지인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날아온 예상치 못한 한 마디.

그래서 네 캘리그라피 강의가 다른 강의에 비해 좋은 점이 뭔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 강의가 다른 캘리그라피 강의와 비교했을 때 뭐가 좋은가? 비교적 싼 강의료? 엄밀 따졌을 때 그렇게 싼 것도 아니었다. 특출 난 실력? 물론 자타공인으로 인정받은 캘리그라피 실력이지만, 공부와 마찬가지로 내가 잘 쓰는 것과 잘 쓰도록 가르치는 것은 별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강의보다 특별히 좋은 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강의의 특별함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05 신의 한 수



집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어떻게 특별한 캘리그라피 강의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떤 걸 해야 대학생들이 관심 있어할까? 다른 캘리그라피 강사들이 하지 않는 것은 뭘까? 계속 질문을 던지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인스타그램을 켠 순간, 뇌리에 무엇인가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내 캘리그라피는 다른 캘리그라퍼들이 올린 캘리그라피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분명히 검은 잉크로 쓴 글씨인데 형형색색의 그라데이션이 들어가 있거나, 캘리그라피가 새겨진 풍경 사진을 주로 올렸다. 바로 포토샵으로 글씨에 색을 입히고, 다른 사진에 글씨를 입히는 수고를 하며 이미지를 업로드했던 것이다. 다른 캘리그라퍼들은 거의 대부분 카메라의 각도나 조명에 심혈을 기울여 사진을 찍어 올리지만, 나는 포토샵으로 모든 작업을 해왔다. 광고 동아리에서 온갖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스스로 습득했던 포토샵 실력을 여기에 쓰고 있었다. 그리고 든 생각.


포토샵까지 가르쳐주면 어떨까?


나는 곧바로 강의 커리큘럼 마지막에 포토샵을 간단히 가르쳐주는 포토샵 교육 콘텐츠를 삽입했다. 대학생들이 자주 쓸만한 기능이면서 핵심적인 포토샵 기능만을 가르쳐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강생들이 그때까지 적을 캘리그라피들을 직접 이미지화시켜 포토샵 작업을 하게 함으로써 보람도 느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대성공이었다. 수강생이 첫 주에만 10명이 신청했고, 그 이후 계속 수강 신청이 들어왔다. 생소한 캘리그라피를 배우면서도 포토샵까지 배울 수 있는 일석이조 강의를 다른 데서는 절대 찾을 수 없으니까.






06 캘리그라피 강의에서 수강생들이 원했던 것



캘리그라피 강의를 진행하면서 문득 깨달은 것은, 강의에서 대학생들이 원한 건 비단 캘리그라피나 포토샵 그 자체는 아니었다. 캘리그라피와 포토샵으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창작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그것이 대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게 내가 강의에 부여해준 캘리그라피 강의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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