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라는 대명사, 희생이라는 동의어

나는 '딸'이었으나 한 번도 딸인 적이 없었다.

by 아련나래

"우리 집에서 '딸'이라는 단어는 사랑받는 존재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가장 먼저 희생해야 할 존재의 대명사였다."


나는 엄마의 엄마였고, 때로는 든든한 남편이었으며 , 모든 속마음을 받아주는 다정한 친구였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딸'이었던 적은 없었다.


"엄마, 왜 엄마는 꼭 아플 때만 우리 집으로 와?"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나의 물음에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내가 안 아프면 너희 집에 올 필요가 뭐가 있냐."

단호했다. 그 말은 곧 내가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유일한 조건이 엄마의 병증이라는 선언 같았다.

나는 2녀 1남 중 둘째 딸이다.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포항에 홀로 계신 엄마는 몸이 아플 때마다 치료를 목적으로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종착지는 언제나 우리 집이었다.


언니는 직장 생활에 쫓겼고, 갓 결혼한 남동생은 올케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전업주부라는 명목하에, 그리고 결혼 전부터 가장 성실하게 효도를 '수행' 해왔다는 이유로 나는 가장 만만하고 편한 선택지가 되었다. 엄마는 굳이 우리 집의 안락함을 칭찬했다. 그것은 찬사가 아니라, 오직 이곳에서만 마음껏 응석을 부리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일흔의 엄마는 여섯 살 아이로 변했다. 마치 남의 집에서 눈치 보며 자라온 아이가 뒤늦게 친부모를 만난 것처럼, 엄마는 쉴 새 없이 나의 모든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다.

각종 수술과 시술이 이어지는 보름, 혹은 한 달의 시간 동안 나는 다중인격자가 되어야 했다.

살림을 챙기고,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을 돌보는 틈틈이 엄마의 간병과 식사, 수시로 터져 나오는 요구사항을 받아냈다. 무엇보다 힘든 건 하루 종일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야 하는 '감정의 수발'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라는 자아는 흐릿해졌다.

남편과 아이들보다 항상 엄마가 우선순위였다.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금세 역력해지는 엄마의 서운한 기색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지독한 죄책감과 불안이 나를 덮쳤고, 어느새 엄마의 병간호는 오롯이 내게 주어진 형벌 같은 의무가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친정식구들은 그 희생을 당연한 풍경으로 여겼다. "잘하는 네가 안 하면 누가 하니?"라는 말은 칭찬의 탈을 쓴 방임이었다. 아빠도 안 계신데 혼자 계신 엄마가 마음이 쓰여 시집와서도 늘 뒤를 돌아보았던 내 마음이, 결국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된 셈이다.


엄마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면서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라는 서늘한 생각이 스칠 때면,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런 못된 생각을 품었다는 사실에 더 큰 죄책감을 느끼며 나를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럴 때마다 나를 구원한 건 역설적이게도 엄마의 유일한 칭찬이었다.

"넌 어릴 때부터 형제 중에 부모에게 제일 나았다. 네가 바로 엄마의 날개였어."


그 달콤한 말에 취해 나는 꺾인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날게 하는 날개가 아니라, 엄마의 곁에 영원히 묶어두는 족쇄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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