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와 고독의 성자
창조력이 충만한 사람들이 창조과정에 보여주는 몰입과 열정은 보는 것 만으로도 감동이 넘칩니다. 그러나 창조력이 충만한 사람은 종종 매우 고독한 홀로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이것은 종종 조증과 울증의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창조의 영감이 들이닥치면 신들린 듯이 몰두하다가 그 영감이 사라지면 맥이 탁풀려 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호르몬의 주기적 변동으로 유발되는 조울증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단지 창조를 위한 에너지의 축적과 발현의 주기에 해당합니다.
많은 창조적인 작가들이 홀로 숲속에서 명상에 잠기는 것을 보게됩니다. 유발하라리나 베르베르베르나르의 명상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글을 쓰고 열정적으로 강연하고 토론합니다. 그러나 매일 일정한 시간을 들여 혼자 명상에 잠깁니다. 이들은 이 명상을 창작의 한 부분으로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먼 거리를 산책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잡아둘 수 없기에 생각은 흩어지는 것 같지만, 잠재의식에 간직된 생각은 창작의 과정에 아침해처럼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이런 홀로있기와 곰곰한 생각의 끝은 무엇일까요? 통찰력입니다. 통찰력은 종종 지혜와 같이 여겨집니다. 인사이트는 내면의 눈동자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보는 눈. 통찰력이 충만한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이나 들리는 말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유 있고 알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줍니다. 그 깊이는 어디에서 느껴질까요?
첫째는 겸손함입니다.
통찰 충만한 사람들은 명예를 애써 구하지 않습니다. 명예의 본질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매달리던 예수에게 죽이라 외쳤습니다. 남에게 받는 인정이나 인가보다 본인 스스로의 가치와 일관성을 바로보기 때문에 절대로 남들 앞에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내면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결코 자만할 수 없습니다. 마음 깊은 구석에 차있는 자신의 모순과 자신의 악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본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난하기를 주저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비폭력적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형제를 보고 욕을 하면 살인한 것이라는 과장된 법적용을 요구했습니다. 욕하는 것의 본질이 살인에 해당함을 알려준 것입니다. 지혜자는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낳는 것을 압니다. 세력이 더 큰 세력을 만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들은 온화하고 미간이 부드럽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조용히 웃습니다.
셋째, 인내합니다.
본질을 바라보는 통찰 충만자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부당함이나 모욕을 참아냅니다. 이것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존중으로 잘못된 현상을 넘어섭니다. 참아냄은 그저 가만히 잇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다를 길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보여줌이 조롱거리가 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움으로 다가서고 마침내 문화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단순합니다.
통찰 충만한 사람은 단순합니다. 교묘한 논설을 펼치지 않습니다. 통 잘 충만자들의 대화는 신비합니다. 대화 사이에 이미 수많은 말이 숨어있습니다. 예수와 베드로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는 그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연법칙은 아름답고 단순하다고 했습니다. 단순하기에 아름답다는 말도 합니다. 진리의 고유한 특성은 단순함입니다. 그래서 통찰 충만자는 단순합니다. 미니멀의 삶을 살아갑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갖습니다. 모든 선택에서 단순함을 선호합니다. 음식, 옥, 생활방식, 단어 선정 모두가 그렇습니다.
다섯째 일관됩니다.
본질을 알기에 호수의 표면에 잔물결이 일듯이 변덕이 없습니다. 통찰 충만자의 깊이는 흔들림 없음으로 드러납니다. 하던 일을 계속하고, 감정을 끓이지 않습니다.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말한 아르키메데스도 그렇고 이들은 자신의 하던 일에 충실합니다. 종종 이들도 변화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통찰로 본 그것이 다를 때만 일어납니다. 이익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따라 변하기에 이들의 변화는 쉽지 않으나 한번 변하면 큰 물결을 일으킵니다.
여섯째 달관합니다.
에픽텍투스는 우리의 일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어쩔 수 없는 일을 구분함으로 행복에 이를 것을 권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욕망함으로 스스로 불행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통찰은 행복에 이르는 길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스스로를 슬픔이나 억울함에서 분리해서 바라보는 능력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슬픔이나 억울함으로 가려진 본질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것에 흔들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일곱째 통찰을 키우기 위해 고독합니다.
혼자 있기는 통찰로 충만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수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인 예수는 새벽 미명에 혼자 기도했습니다. 그 홀로 있는 고독은 외로운 고독이 아니고 본질과 마주 서는 훈련입니다. 사람을 떠나 말없는 자연으로 들어서면 우리의 영성은 마음이 눈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조용히 본질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고독은 자연처럼 필요 없는 것들이 떨어져 소멸되고 오직 생명만이 자라나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