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글이 되는 순간
창조력의 원동력으로 상상력은 항상 으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상상력은 없는 것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들 수는 없어도 상상은 이제까지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아예 없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의 원천은 고대인의 설화에 가득합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바쁘지 않았기에 겨울날의 동굴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거나 해가 진 긴 밤에 상상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상상은 주로 그들이 던졌던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그럴듯한 답이 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리는 무슨 자랑스러운 원칙을 갖게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형태만 달리하고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 인들은 상상력이 탁월하여 수많은 개념들을 신과 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파생되는 개념들을 신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 신으로 설명하여 매우 복잡한 신간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제우스는 틈만 나면 바람을 피워 다양한 개념들의 탄생을 주도합니다. 바람피우는 신들의 왕은 참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은 이렇게 신의 세계를 상상했습니다. 신들은 사랑하고 질투하고 다투는 일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오래된 설화에는 창조설화가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등장하는 우주의 창조와 삼라만상 그중에 인간의 창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혼돈의 삼신과 질서의 삼신이 전쟁을 벌여 마침내 질서의 삼신이 승리하고 창조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혼돈의 삼신을 죽이는 과정에 하늘과 땅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에 대하여는 노예로 쓰려고 만들었다가 하도 말을 안 들어 그냥 내버려 둔 것으로 표현하여 어느 정도 인간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용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도의 설화는 주기적 순환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상상합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바가바드기타라는 경전에 등장하는 유일신입니다. 이 유일신은 알파와 오메가이고 모든 논쟁의 결론이고.. 이런 식의 묘사가 등장합니다. 동시에 영혼 불멸의 사상을 설파합니다. 친척의 반란을 응징하러 가는 왕자가 친했던 친척을 죽여야 하는 고통으로 번민하는데 마부로 변신한 신은 죽여도 좋다 그들은 다만 육체가 죽을 뿐이고 너는 영혼을 죽일 수없다는 말로 시작하여 유일신이 지배하는 윤화의 세계를 설명합니다. 이 경전은 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죽는 순간에 떠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경전에 따르면 죽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을 생각해야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해산물 스파게티 같은 것이 떠오르면 홍합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죠..
유일신의 세계는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신인 야훼는 신기한 신입니다. 자기의 이미지를 만들어 설명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이란 설명 아닌 설명을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정령 죽으리라 라고 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태인들은 하나님을 자기가 보지 못했음을 말하려고 하는지 조상들을 들먹거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분들이 겪었던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유태인들도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어떻게 짐승과 다른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상상 혹은 계시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의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중요한 일이고 사회를 구축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폭발적이 과학의 발전에 힘입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사이엔스들에게는 이러한 고대인들의 상상의 허구를 들춰내면서 이것을 그릇된 믿음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대신 새로운 상상을 들춰냅니다. " 너희들 몸뚱이를 구성하는 것이 원자라는 것을 알아? 원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 우주는 얼마나 큰 줄 알아? 우주가 얼마나 된 줄 알아? 왜 이렇게 다양하고 신기한 생물이 잇는 줄 알아? 질문에 질문을 덧붙이면서 오늘날 세계의 상상의 근원은 과학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사이엔스 시대의 샤먼은 과학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저들만의 작은 실험실이나 거대한 가속기에 모여서 알 수 없는 방정식과 데[이터 더미를 놓고 이리저리 경향성을 판단하고 무엇을 발견했다고 외쳐댑니다.
고대의 샤먼이나 현대의 과학자나 그저 재미난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담꾼이나 공통적인 것은 상상을 설명해야 하는 필요성입니다. 고대 샤먼들은 신을 설명한 우상을 지었고, 우상과 더불어 제례의식을 행함으로 신과의 교감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새로운 발견을 광고하고 그것이 바꿀 미래를 꿈꾸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어김없이 공상과학과 같은 상상의 실체를 그려줍니다. 그것은 때론 이야기 형태의 글일 수도 있고, 글을 포함한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자는 상상을 현실로 바꾸어 우리들의 손에 제품을 쥐어줌으로 더욱 강력한 샤먼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상상은 어쩌면 신과의 교감, 타지 않는 불꽃과의 만남, 세밀한 음성의 청취일 것입니다. 상상하는 자는 항상 자기가 만났던 불꽃의 자리에 갑니다. 샤먼은 산속 동굴의 촛불 밑으로 가서 밤을 새우고, 과학자들은 연구실의 실험장치 밑에 쪼그려 앉아 센서의 신호가 튀어 오르기를 기다립니다. 문인들은 글 신이 임하는 순간을 위해 커피숍과 긴 여행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오르는 불꽃이 임하는 순간 이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이것은 말이 되었다가 마침내 글로 고정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 샤먼이 써준 글을 해석하면서 다시 그 불꽃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 상상은 원래의 불꽃과는 가른 것이고, 그 샤먼이 죽더라도 해석하는 자들의 몫이 되어 상상 속의 불꽃이 퍼져나갑니다.
상상이 말이 되고 글이 되고 글이 다시 상상이 되는 이 순환은 결코 원위치로 가지 못하는 나선형 운동입니다. 이 나선형 운동 속에 상상은 전혀 다른 구상으로 세계를 구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