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교수들이 모이는 사적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외국 명문대와 국내 유수 대학의 최고 과정들을 거친 훌륭한 분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들 사이에서 어찌나 위축되던지, 입을 열면 내 목소리의 떨림까지 상대에게 전달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잔뜩 들어갔던 어깨의 힘이 스르르 풀리며 마음이 이완되는 묘한 경험을 했다.
아마도 내 마음속에서 그들은 ‘훌륭한 과정’을 마친 ‘매우 완벽한 사람들’일 것이라 단정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 초라한 밑바닥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했던 듯 하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서서 관찰해 보니, 그들 역시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실수도 하고, 이야기 내용에는 헛점도 보였으며, 인격적으로 모두가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나처럼 불완전한 사람들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내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라 주변에선선 몰랐겠지만, 그것은 마치 개안을 한 것 같은 큰 경험이었다.
그때 알게 된 또 한 가지는자신감이라는 것은 칭찬을 받고 무언가를 잘해내야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나의 밖에 있는 완벽한 것들과 안에 있는 불완전한 나를 비교하느라, 정작 내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것이었는데, 타인의 기대와 기준에 자꾸 나를 맞추려고 하느라 늘 나는 초라했던 것이다.타인의 시선을 염려하던 마음이 비로소 내부의 나에게로 이동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나를 위해 선물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방법론일 뿐이다. 실제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의 본질은 외부에 있던 기준점을 내 안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심어 주어야 할 가치 또한 바로 이 '건강한 자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말로 전달하기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어떤 옳고 완벽한 틀을 제시하고 "거기에 맞추면 더욱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아이들은 도리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더욱 초라해지는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주는 정답이 아니라 살아가며 스스로 익혀야 하는 이 중요한 감각은, 그래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훗날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나의 불완전함을 편안하게 껴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 전, 교수님들의 인간적인 빈틈을 보며 내 어깨의 힘이 빠졌듯, 아이들도 부모의 빈틈을 보며 스스로 숨 쉴 구멍을 찾기를 바란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 안도감이 아이들의 내면에 단단한 기준점으로 자리 잡기를, 나는 그저 묵묵히 응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