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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윤 변호사 Apr 16. 2019

5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지속되는 아픔과 '지겨움'에 대하여

의뢰인에게 화를 내다.


평생을 전과 없이 바르게 살던 한 중년의 남성이 별안간 다른 남성의 배를 미리 준비한 칼로 힘껏 찔렀다.

피해자는 장기의 상당 부분에 심한 손상 입고 오랜 기간 혼수상태로 지내다 겨우 정신을 회복했다.

그리고는 수 차례의 대수술과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나는 가해자 쪽 변호를 맡았다.

살인미수와 같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서는 형을 줄이기 위해서 '합의'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가해자의 형을 줄이기 위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사투를 벌일 피해자에게 접근하여 합의를 시도한다는 것은 비인간적인 2차 가해임이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 쪽 변호사로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피해자의 집에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하겠다는 가해자 측 가족들을 겨우 만류하며,

정말 사죄를 한다면, 진심으로 어떠한 것도 바라지 말고 그냥 사죄만 하라고..

그것도 직접 다짜고짜 찾아가서 피해자 측의 입장 무시하고 사과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손편지를 쓰라고 했다.

충격이 없을 리 있겠냐만은 그나마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이 읽지 않을 권리라도 보장해 주고 싶어서.


그렇게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족들이 피해자에게 긴 손편지를 쓴 것이 수 차례.

답이 있을 리 없다.

그 사이 가해자 쪽 가족들은 형이 높게 나올 것이 걱정돼 애가 탄 나머지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피해자에게 대신 접촉하도록 했다.


그렇게 부탁을 받은 지인이 피해자의 집에 직접 다녀온 모양이다.

지인의 말을 들어보니, 피해자가 울부짖으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더란다.


더 이상의 합의를 위한 시도는 피해자에게 고통만 줄 것이고, 합의를 해 줄 가능성도 없어 보였기에,

형량을 낮추는 다른 방법은 모두 마친 상태에서 

피고인과 피고인의 가족에게 피해자에게 더 이상 접촉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나왔던 1심의 형은 3년 6월.


검사는 형이 낮다고 항소를 했고,

피고인은 항소심에서 계속 합의를 시도해 보자며 항소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항소심에서도 변호인으로 선임되었는데, 

피고인의 가족은 항소심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는지(양형을 이유로 상고는 할 수 없으니 항소심이 마지막 기회인 셈) 더욱더 적극적으로 피해자에게 합의를 시도할 마음을 먹었다.

이제는 변호인의 만류도 통하지 않는다.


피고인의 가족이 피해자의 집에 찾아가기를 몇 번.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 합의의 가능성.

항소심의 막바지가 되자 피고인과 피고인의 가족이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사건 벌어진 지 1년도 넘었고, 일상생활도 한다는데 합의 좀 해주면 안 돼?

이렇게까지 하는데 용서를 안 해준다니 독하네. 

이제 용서해 줄 때도 된 거 아냐? 징하다 징해."


그 말을 들은 나는, 변호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들에게는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그저 계속 사죄하고 또 사죄할 뿐,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가 돌아와 평생 불구로 살면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피해자에게는 사건이 끝난 게 아니에요.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서서히 치유되고 안정을 찾으며 자연스레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면 그때 감사하고 다행스럽게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피고인의 가족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항소심이 끝났고, 피고인에게는 1심의 형이 낮다고 이유로 5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의 그 날을 말이다.


그 사이 나는 결혼하여 배 속에 10달간 아이를 품고, 핏덩이를 낳아

현재까지 함께 따스한 숨과 살결의 보드라운 그 온기를 느끼며

하루하루 더욱 사랑스럽게 자라나는 딸이 생겼다.


그런 딸아이를 보면서,

"내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내가 위험에 빠진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방법으로 내 목숨이 필요하다면 난 기꺼이 내 목숨을 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던 내가 그렇게 변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다.


그렇게 나만 알던 한 인간이 엄마가 되어갈수록, 2014년 4월 16일의 그 날은 시간과 비례하여 더욱 사무치게 다가온다.


만 3년을 함께 한 내 딸도 이렇게 애틋한데...

매일같이 일하는 중에도 사진과 동영상을 들여다보고, 퇴근하면 딸아이 볼 생각에 설레는데...

더 말을 잇기가 어렵다.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그 누가 '지겹다' 하는가


5년이 지났다고 그들의 상처가 희미해질까

누가 함부로 그들의 상처를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저 함께 안타까워하고, 기억하려는 우리들에게는 '과거'의 일일지 몰라도

떠난 자들의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그 날부터 이어지는 현재일 뿐이다.

아직도 정확하기 이루어지지 않은 진상규명과 다른 목적으로 이를 이용한다는 따가운 시선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쥐어짜 목소리를 내어보지만,

이제 그만하자는, 지겹다는 사람들의 싸늘한 반응.

무엇보다 아직까지 느껴지는 그 온기와 목소리. 함께 살을 맞대고 마음을 나누며 살아온 세월들.

잊을 길이 있으랴. 


그들에게는 아직 그 날이 과거일 수 없다.

'시간이 흘렀으니 괜찮아졌겠지'라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2차 가해나 다름이 없다.


우리는 그저 그나마 그들의 울분이 조금이나마 풀리도록 정확한 진상규명에 힘을 실어주고,

함께 잊지 않고 슬퍼해 줄 뿐이다.

조금씩 그들의 삶이 안정되는 때가 언젠간 온다면, 너무나 감사하고 다행으로 여길뿐이다.


누구도 함부로 지겹다고, 그만 좀 하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






우리가 그 날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


그 날 그 사건은 그들이 아닌 우리 중 누군가가 피해자일 수도 있었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터졌을 사건이었던 것이다.

사회의 한 시스템 안에서 생활하는 우리 각자가 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 사건을 통하여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그런 사건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나, 그리고 우리 가족만 안전한 곳은 없다. 

소중한 나와 내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안고 기억해야 한다. 


기억을 넘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마음 놓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이 그나마 치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오지랖을 부려 나와 관계없는 타인의 일에 신경을 쓰는 일이 아니다.


더 나은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다시는 또다시 우리 중 누군가가 그런 아픔을 겪고 고통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안아주며, 연대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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