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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윤 변호사 Mar 09. 2020

아이와 어른을 대하는 방식은 같다.

변호사가 엄마가 되어보니 깨닫게 되는 것.

올해 다섯 살이 된 첫째가 부쩍 짜증이 늘었다.

타이를라 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펄쩍펄쩍 뛴다.

고집은 또 어찌나 센지... 한 번을 안 진다.

"엄마 그만 말해! 한번 말했잖아! "(온몸에 힘을 주고 쏟아내는 상황)

"어허! 그만 하랬지! 나한테 혼난다!"(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첫째가 나한테 혼내며 하는 말)


분명 애교 많고 밝기만 한 아이였는데 어느 새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커가는 과정에서 자기의 고집이 생기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동생이 생기면서 엄마 아빠를 빼앗겼다는 느낌,

자기만의 세상이었던 엄마 아빠 품을 떠나 처음 겪는 사회생활인 어린이집 적응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섯 살 딸에게는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일 테다. 많이 예민해질 수밖에.


특히나 아침마다는 어린이집을 보내기 위한 전쟁.

출근 준비를 하면서, 첫째를 어린이집 보내기 위해 깨우고, 씻기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이 것만 해도 산 넘어 산인데,

가장 큰 산은 '어린이집'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울면서 펄쩍펄쩍 뛰고 도망가는 첫째를 설득하는 일.


"해인아, 어린이집 다녀오면 엄마가 많이 놀아줄게~ 장난감도 사줄게!"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해인이 많이 보고 싶대!"

하...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안 먹힌다.


급기야는 나까지 답답한 마음에 화가 난다.

"자꾸 그렇게 울기만 하면 엄마 화낸다."

"뚝 그쳐. 그만 소리 질러. 열 셀 동안 조용히 안 하면 정말 화낸다! 하나, 둘, 셋.....!!!"

점점 내 얼굴도 굳어지고 목소리도 냉랭하고 커진다.

그걸 느낀 첫째는 오히려 더 크게 울면서 도망간다.


어르고 달래도 안돼, 엄하게 해 봐도 안돼... 엄마인 나도 처음 겪는 상황에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 일단은 해인이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유 없이 울거나 떼쓰는 아이는 없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어린이집에 가게 된 해인이.

모두가 자신에게만 집중해주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만 뛰어놀던 한 아이는

뒤늦게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세상은 녹록지 않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져주지는 않는다.

이미 친해져 버린 친구들 사이에 뒤늦게 끼어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노는 방식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해인이가 느끼는 감정은 본인도 처음 느껴 낯설고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소외감'과 '외로움'일 것이다.


매일같이 그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도 처음이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고 어려우니 어린이집에 가면 자꾸 집에 가고 싶은 생각만 들 수밖에.

해인이에게 '어린이집에 가는 것'은 '소외감과 외로움에 직면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아침마다 다시 직면해야 할 그 낯선 감정들을 겪지 않고 피하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해인아. 얼른 씻고 밥 먹자. 어린이집 가야지."

이 말이 엄마에게는 그냥 평범한 말이지만, 해인이에게는 두려운 말이다.

부드럽게 말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해인이의 입장에서 차분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엄마로서 했던 말과 행동들로 인해

해인이가 했던 반응들이 왜 그랬는지 알겠다.


그래,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인 나부터 해인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는 조급함을 버리려고 노력한다.

내 조급함은 분명 내 표정과 말투에서 그대로 나와 해인이가 고스란히 느끼리라.

마음을 가다듬는다.


일단은 해인이를 꼭 안아준다.

아기 안아주듯이 꼬옥 안아주면서 엉덩이도 토닥토닥, 등도 쓱쓱, 이마도 쓰다듬어준다.

얼굴 여기저기 뽀뽀도 해 주고 볼도 부비부비 해준다.

"해인이 잘 잤어? 엄마는 해인이가 제일 좋아! 최고 사랑해!"

부드럽고 밝은 얼굴로 말한다.


해인이가 활짝 웃으며 엉덩이 씰룩씰룩 애교 부린다. 더욱 내 품에 파고든다. 이쁜 내 새끼.

이러한 스킨십과 대화를 통해 아이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신을 보듬어주고 가장 사랑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것이다.

자신의 삶에 견고한 지지대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따스함을 느끼며 충분히 서로 교감을 한다.

"일어났으니까 엄마랑 어푸어푸 씻어볼까?"

"자고 일어나니 배가 고프네. 엄마 아빠랑 같이 밥 먹자!"

여기까지는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무슨 옷을 입을까? 해인이가 골라봐!"

이쯤 되면 눈치를 채고 먼저 말을 꺼낸다.

"어린이집 안 갈래."


"안돼. 가야지!" 이러면 또다시 전쟁의 시작이다.

일단은 또다시 안아준다.

"해인이는 어린이집 가기가 싫구나. " 토닥토닥...

"해인이는 어린이집이 어떤데? 어떤 일이 있었어?"

"(시무룩하게) 친구들이 안 놀아줘"

"진짜? 친구들이 왜 그럴까? 엄마가 선생님한테 '해인이랑 안 놀아주는 친구들 혼내주세요!' 그럴게."

"밥도 다 먹기 싫어"

"진짜? 밥 먹기 싫으면 남기면 되지. 친구들이 다 먹는다고 억지로 안 먹어도 돼! 힘든 거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 엄마가 친구들이랑 선생님께 말해줄게!"

이런 대화들을 통해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내 편이라는 것, 내 맘을 엄마가 이해하고 존중해 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연다.

"이제 어린이집 갈 준비 해볼까? 우리 해인이 잘할 수 있어!"

아직은 칭얼거리기는 하지만 전보다는 덜하다.

"엄마 해인이 믿어도 되지?"

한참을 있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여러 산을 넘은 후 해인이는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겨 어린이집에 간다.


쉽지 않다. 매번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낯선 것이 마냥 두려울 아이에게 무작정 하라고만 다그친다면,

안 그래도 두려움에 힘든 아이가 엄마 아빠에게마저 버려진다고 느낄 수밖에.

그때는 두려움을 넘어 공포감을 느낄 것이다.

그 '공포감'이라는 감정을 아이는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엄마 아빠 나 너무 무서워요. 날 버리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이다.


이때 엄마 아빠가 "시끄러워! 그만 해! 조용히 안 해?"라고 다그치거나

완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면,

그 아이가 느낄 극에 달한 공포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서럽게 우는 해인이를 말없이 꼭 안아줬더니 어느새 곤히 잠들었다.




일단 안아주자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이유 없이 떼를 쓰고 울지 않는다.

"아니, 안 그러던 애가 왜 이래? 시끄러워!"

"뭐 그런 거 가지고 울어? 그만해!"

"왜 그러는데! 이유를 말해야 뭘 해주든가 하지!"

이런 식으로 아이를 몰아세워 공포감을 느끼게 할 것이 아니라 일단 안아주자.


이유불문 일단 안아주자.

따뜻함으로 아이의 부정적인 감정부터 달래주자.

'난 항상 너의 편이야'라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자.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 아이에게 말을 건네자.

"화가 많이 났구나. 맞아 맞아. 기분이 안 좋았겠다. "

아이의 감정을 존중하며 아이로 하여금 엄마가 나를 이해해 준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자.

그렇게 평온해진 아이가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면,

그때 부드럽게 말을 하자.

"엄마는 해인이가 조금만 이쁘게 말을 했으면 좋겠어. 엄마도 이쁘게 말할게. 우리 같이 이쁘게 말해보자.

알았지?"


이렇게 펄펄 끓는 부정적인 감정부터 달래주고, 공감을 통하여 마음을 열어준 다음에야

아이는 엄마의 말이 들린다.

그 이후에야 엄마의 말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안아줄 때 단 한 가지의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진심'이다.

아이가 느낄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고자 하는 그 마음. 진심.

그 마음으로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줘야 아이는 그 진심을 느낀다.




어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변호사를 찾는 의뢰인들은 각자 사정은 다르지만 모두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마음이 분노, 좌절, 배신감, 패배감, 상실감, 암담함 등으로 뒤엉켜있다.

그런 마음으로 어렵게 찾아온 법률사무소 또한 낯설고 삭막하다.

이런 의뢰인들 앞에서 변호사가 사무적으로, 무표정한 얼굴로

"어떤 사건인지 말씀해 보세요."라는 말로 시작한다면

의뢰인들은 자신의 사정을 말하기가 어렵고 주저스럽다.


어렵게 말을 꺼내보지만 그 말마저 어느 정도 듣다가 자르고

"아 결국 손해배상 청구를 하시려는 거네요."

이런 식으로 바로 법리적으로 정리해버린다면,

의뢰인의 입장에서는 변호사가 나를 그냥 많은 사건 당사자 중 한 명으로 취급하고,

수임할 수 있는 사건인지, 돈이 되는 사건인지 여부를 판단하려고만 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물론 사람 사는 일이 대부분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변호사 업무를 오래 하다 보면 의뢰인에게 조금만 사정 설명을 들어도

바로 머릿속에서 어떤 유형의 법률문제인지, 법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그려진다.

그래서 의뢰인의 사정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고, 하소연은 더더욱 들을 필요 없어서 말을 자르게 된다.

시간 투입의 한계도 물론 있고.


그렇게 사건을 수임하게 되면 그냥 보통 법 절차대로 사무적으로 일처리를 하게 된다.

마치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로 똑같은 물건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것처럼.

(아, 물론 단순한 사건들은 뚝딱뚝딱 정해진 법적 절차대로 처리하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법적으로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당사자를 둘러싼 주변 상황과 그 당사자의 감정, 진심으로 원하는 것까지 동일하거나 유사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해결책 또한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결국 의뢰인마다 그에 맞는 해결책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뢰인의 현재 상황과 감정, 진정 원하는 것, 우려하는 것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는 의뢰인이 현재 가진 여러 안 좋은 감정들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이 변호사라면 나를 잘 이해해 줄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의뢰인의 입장에서 듣고, 공감해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만 의뢰인으로부터 최대한 끄집어낼 수 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심란한데,

낯설고 딱딱한 분위기의 변호사 사무실에 온 의뢰인들은 심리적으로 경직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활짝 웃으면서 인사하고 차 한잔을 드린다.

마주 본 의뢰인의 방향으로 상체를 좀 더 가까이하고 부드럽게 말을 꺼낸다.

"제가 시간 초과돼도 상담료 더 안 받을 테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시면 돼요."

"원래 내가 아는 사람보다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털어놓는 게 더 맘 편한 거예요~"


상황에 따라서는 가벼운 사적인 얘기부터 하면서 분위기를 풀어본다.

"어떤 일을 하는 회사예요?"

"와 저는 법만 공부해서 잘 모르는데 이런 일 하시는 분들 대단해 보여요~ 나중에 저도 의뢰드려야겠는데요?"

"이런 일을 시도하시는 것 자체가 대단하죠. 저라면 엄두도 못 낼 것 같은데"


심리적으로 따뜻하게 안아주는 말과 같다.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이든 존중하고, 당신의 편에서 함께 고민해 줄 사람이 되어줄 테니

마음을 열고 당신에 대해 알려주세요'

내 맘이 온전히 전달되길 바라면서.


물론 처음부터 편하게 털어놓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처음의 그 경직되고 경계하는 마음은 약간 누그러진다.


그렇게 시작된 의뢰인의 말에 나는 최대한 맞장구를 친다.

말과 표정, 다양한 몸짓으로

'나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해요'라고 느끼도록 한다.

한동안은 시계를 보지도, 핸드폰을 열지도 않는다.


"아이고, 그동안 직원들에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속으로 끙끙 앓으셨을까."

"얼굴이 새카마네 쌔카매. 뭐라도 챙겨드셔야겠어요. "

"지금은 하늘이 무너지는 일 같아도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라고 느낄걸요. 제가 그건 장담해요"

상황에 맞게 위로도 섞는다.


그러다 보면 의뢰인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여러 가지 사정과 자신의 속내에 대해 다 털어놓는다.

"변호사님께 이런 얘기까지 털어놓게 되네요"라고 말하며 쑥스러워하기도 한다.


비록 변호사와 의뢰인은 돈을 주고 일을 맡기는 수임 계약 당사자 사이이지만,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친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하여

서로 간의 따뜻한 인간적인 감정과 신뢰가 생겨날 뿐만 아니라

의뢰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변호사는

그 의뢰인에게 맞는 소송뿐만 아닌 다양한 해결책을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는 진짜 그러시면 안 돼요. 제가 구체적으로 앞으로 조심할 것들도 같이 정리해 드릴 테니 진짜 지키셔야 해요!"

의뢰인에게 다양한 현실적인 조언도 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던 자신의 사정을 가감 없이 털어놓음으로써 의뢰인의 맘이 후련해지는 것은 덤.


위와 같은 과정에 있어서도 물론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변호사가 진심으로 의뢰인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눈빛과 표정, 행동 그리고 말투를 통해 의뢰인은 그 진심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을 연다.


변호사 홈페이지에 쓸 용도로 찍었던 상담 사진. 의뢰인의 말을 경청하는 콘셉트인데 상당히 어색하다


비단 변호사와 의뢰인의 특수한 관계뿐만 아니다.


아이를 일단 안아주고 보는 것처럼,

일단 포근한 미소와 함께 그 사람을 궁금해하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자.

그 사람이 말을 하며 짓는 표정에 맞춰 함께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마음을 교감해보자.

'당신의 존재 자체를 존중해요. 당신을 더 알고 싶어요'라는 진심이 느껴지도록 해 보자.


'공감'과 '경청'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를 몸에 체화시키고 실제로 진심을 담아

그 진심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드물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더욱 알아가고자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그 진심이 다양한 교감을 통하여 전달되어 상대방이 마음을 연 후에야

비로소 상대방에 대한 충고나 조언도 가능해진다.


진심을 전달하는 그 섬세한 과정이 없는 충고나 조언은

비록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지"라는 표현을 덧붙이더라도

그저 상대방에게는 꼰대질이나 잔소리로 느껴질 뿐이다.

 



"당신은 내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라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남편이 떠올랐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를 잘하면서 나는 왜 이해를 안 해줘? 당신은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자신이 겪은 불쾌한 일을 털어놓는 남편에게,

"당신이 말실수했구먼 뭘. 말 좀 조심하지"라고 말해버렸던 것이다.


당시에는 남편의 반응에 사실은 '으이그, 애 같네 애 같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시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남편은 그저 세상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 던진 말은 마치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에게 "괜찮아? 많이 아프겠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앞을 제대로 보고 달렸어야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처 받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결 이전에 공감과 위로인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건 아이이든 어른이든 불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이 자리를 빌려 남편에게 심심한 사과를 한다.




'살아간다'는 표현보다는 '살아낸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은 요즘이다.

우리 각자 모두 수많은 역할과 의무를 두 어깨에 가득 짊어지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외롭다.

두렵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진심'이 필요하다.


나만 생각하기도 살기도 벅찬 세상이라며 타인의 힘든 처지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관심 갖고,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의 마음을 건네는 것,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하다.


서로 건네는 사소한 따뜻함들로 인하여 우리는 함께 버티며 한평생 살아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네고 싶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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