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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윤 변호사 Dec 09. 2019

어느 날 문득, 그가 내게로 왔다.

feat. 두 번째 제왕절개 출산

폭풍 직전.. 가족이 셋 일 때 찍은 마지막 사진

출산날을 잡다.


첫째를 제왕절개로 낳았었다.

일을 쉴 수 없었던 나는, 예정일을 2주 정도 앞두고 출산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산 전 급히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온 진통..

나는 힘들게 컴퓨터 앞에 앉아 주기적인 진통에 맞춰 진통이 오면 헐떡거리다가, 진통이 잦아들면 서면을 쓰면서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 서면도 완성하고 진통도 못 견딜 정도가 되자 남편을 깨워 병원으로 갔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열매(태명)가 태변을 먹을 수도 있었다며 혼내던 선생님.

더 위험한 것은 열매의 심장 박동이 약해서 자연분만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급작스럽고 위험한 상황에서 머리 한 대를 얻어맞은 듯 멍해있던 나는 자책할 새도 없이 떠밀리듯 수술대에 올랐다.

그렇게 2.39kg의 작디작은, 그러나 감사하게도 너무나 건강한 첫째를 품에 안았다.

.

.

.

그로부터 3년 7개월 후, 열무(태명)를 뱃속에 품은 난 두 번째 제왕절개 수술 날짜를 잡았다.

우리 가족 모두의 삶이 한순간에 바뀌는 폭풍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의 끝머리에 매달려서 배가 가라앉는 것을 그저 바라보며 온몸으로 거세고 차가운 바닷물을 겪어내기 직전의 잭과 로즈의 심정이랄까.






그를 만나다.


제왕절개는 전신마취와 하반신 마취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째는 아무것도 몰라 그저 두려워 전신마취를 선택했고,

둘째는 그래도 아이 태어난 첫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하반신 마취를 택했다.


태어나서 수도 없이 찔려봤을 주삿바늘일진대, 나이를 먹어도 그 찔리기 직전의 공포와 찔린 후 바늘이 몸안에서 움직이고 약물이 들어가는 그 차갑고 화한 느낌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덧 다리가 어름장같이 차갑고 아무런 느낌도 없다.

머리는 멍하고 숨쉬기도 어렵다.

얼마나 지난 것일까.

간호사들이 내 배를 지그시 누르더니 갑자기 아이 울음소리가 귀를 찔렀다.

아, 열무 태어났구나.

한 간호사께서 태어난 열무를 보여주신다.

건강히 잘 태어났구나..

기쁨과 감동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짧게 안도하며 깊은 잠에 들었다.   


엄마 뱃속에서 편안히 있다가 준비도 없이 갑자기 낯선 곳에 나온 열무. 저 조그맣고 여리디 여린 것이 느꼈을 공포와 스트레스는 얼마나 컸을까.


2.9kg의 사내아이 열무.

그렇게 열무와 나는 아들과 엄마로서 마주했다.






제왕절개 후 일주일 간의 입원


이런 말이 있다.

자연분만은 일시불, 제왕절개는 할부.

산모가 느껴야 할 고통의 총합은 같지만 고통의 지속성과 강도는 아무래도 다르기에.

임신 막달 퉁퉁 부었던 손이 수술 직후 구부리기 어려울 정도로 부어버렸다.


금식 과정을 거치고 여러 가지의 링거를 맞으면서도,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부은 몸을 이끌고 모유수유를 위하여 아침, 점심, 저녁, 밤, 새벽을 불문하고 신생아실을 들락날락거렸다.

모유수유는 그저 쉽고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꾸준하고 절박한 노력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나오고 늘어나는 것이다.

빠는 힘도 약하고 아직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 빽빽 울어재끼는 신생아를 안고, 몇십 분에서 길게는 한두 시간 동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몸을 웅크리고 목을 숙인 자세로 젖을 빨린다.

그렇게 나오라는 젖은 안 나오고 내 눈에서 눈물만 하염없이 나온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내 새끼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젖 잘 안 나오는 것이 엄마 못난 탓인 것 같아서.


몸이 회복되는 건지 모르겠다.

수술한 부위는 계속 아프고, 좀 누워있고 싶을 때나 밥 한 술 뜰까 할 때 어김없이 수유하라고 전화가 온다.

잠은 부족하고 몸도 젖도 붓는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아프다.

삼시세끼 미역국을 입속에 들이붓는다. 평소에 국물을 잘 입에 안 대던 내가 국물까지 깨끗이 들이켠다.

그저 젖 잘 나오라고.

 

신생아실에서, 모유수유를 하던 중 잠든 내새끼 모난 데 없나 이리 저리 둘러본다.






산후조리원이라 쓰고 모유수유 사관학교라고 읽는다.


일주일의 입원기간이 지나 산후조리원에 입소했다.

링거를 모두 뽑으니 좀 살 것 같다.

부기도 조금씩 빠지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스파르타 모유수유 돌입이다.


사실, 첫째 때 처음에 젖몸살도 심했고 일하면서 유축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둘째는 낳자마자 젖을 말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둘째 얼굴 보자마자 계획 전면 수정.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하는 데까지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하는 김에 제대로 해보자 하여 신생아실에서 수유 콜 올 때마다 부지런히 뛰어갔다.


조리원 생활을 이 이상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조리원에서 푹 쉬며 몸조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각이다.

물론 끼니 챙겨주고 갓난아기 대신 돌봐주며 빨래 걱정 안 하는 것은 너무 좋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산모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수유 콜에 다크서클이 내려온 채로 수유실에서 꾸벅꾸벅 졸며 결린 어깨 두드려가며 모유수유를 한다.

내 옆 방 산모는 수유 중 코피를 쏟았다.


그렇게 둘째는 신생아실에서 가장 큰 목청을 자랑하며, 엄마의 잠과 눈물과 간절함으로 만들어진 모유를 먹어가며 무럭무럭 자라 갔다.






본격적인 육아 시작과 일 복귀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잠시 시댁에서 머문 후 우리 부부와 네 살인 첫째, 그리고 아직 신생아인 둘째는 집으로 컴백했다.


본격적인 육아 전쟁의 시작.

아직 낮밤을 가리지 못하는 둘째 덕에 우리 가족 모두 새벽에 몇 번씩 깨기 일쑤였고,

특히 나는 젖 양을 늘리기 위해 하루 3시간 텀으로 유축을 했다.


일 복귀를 하면 직접 수유를 할 수 없으니 유축으로 젖을 먹인다.

사무실에 갈 때도, 재판 갈 때도 유축기와 모유 저장팩을 챙겨 간다.

한 방울이라도 더 나오라고 손으로 젖을 짜고 있자니 손가락 마디마디, 팔목 마디가 시큰거린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그저 젖이 조금이라도 더 나와서 둘째가 엄마 젖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맘.

그게 엄마 맘인가 보다.

우리 엄마도 나를 그렇게 키우셨을 거다.


재판 갈 때 도시락 싸가는 거 아니다. 먹으려고 갖고 다니는 거 아니다. 먹을 거 만들려고 갖고 다니는 거다. 보냉 가방과 보냉팩, 그리고 휴대용 유축기.
밤낮으로 노력하다 보니 먹는 양과 수유량이 맞춰진다. 잘만 먹어다오.






첫 번째 복병, 첫째의 어린이집 적응


이거슨 천운이다.

첫째 딸 50일 때부터 자신의 손녀만큼이나 끔찍이 아끼고 사랑 듬뿍 주시며 키워주셨던 시터 이모님께서 둘째를 봐주시기로 했다. 자연스레 첫째는 어린이집이라는 곳을 처음 들어가게 되었다.


난 어린이집은 그냥 보내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엄마 아빠와 떨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기에, 아이가 처음 겪을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두 달 정도 적응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활달하고 낯을 가리지 않는 첫째이기에 어린이집 적응은 너무나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애교 많고 밝던 첫째가 아침마다 어린이집 안 가겠다고 징징거린다.

엄마가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면 어린이집에 가겠단다. 환장한다.


그렇게 아침에 설득에 설득을 하고, 어르고 달래며 밥을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히자니 나도 아이도 진이 빠진다.


엄마 곁을 떠나 처음 겪는 사회.

어린아이가 느낄 불안함이 얼마나 컸을까.


그 불안함을 이겨내며 우리 딸은 '부모'라는 안락한 울타리를 벗어나는 연습을 조금씩 하고 있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아이들 앞에 선 우리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두 번째 복병, 첫째의 퇴행 행동과 둘째에 대한 질투


이건 뭔가.

그렇게 엄마 아빠 말을 받아치며 거침없이 말대꾸를 하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던 아이가 네발로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응애응애'하고 울기 시작한다. 당황스럽다.


둘째한테 관심을 뺏겼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나 보다.

자신도 아기처럼 행동하면 둘째처럼 안아주고 보듬어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어느덧 첫째는 엄마 껌딱지가 되었다.

다른 사람은 다 뺏겨도 엄마는 뺏길 수 없다고 결심한 듯, 엄마가 동생을 안아주거나 하트 뿅뿅 눈빛을 날리면 귀신같이 알아보고 자기만 안아달라 한다. 응애응애 한다.


그래. 첫째 입장에서는 오로지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다가 뺏겼다고 느꼈을 것이다.

엄마마저도 빼앗길 것 같은 위기감이 드는 것도 힘겨운데, 어린이집까지 가란다. 홀로서기하라고 떠밀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외롭고 고달프다.


하루는, 첫째가 이런 말을 했다.

"다시 아기가 되고 싶어"

그저 포근한 엄마 품에서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해도 먹기만 해도 "잘한다~ 잘한다!" 소리 듣던 때가 그리웠나 보다.


나이 먹으면서 해내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힘들지만 이겨내며 커나가야 한다는 것을 네 살짜리 딸도 알았나 보다.


  




세 번째 복병,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옮아오는 감기


첫째는 잔병이 거의 없었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이모님과 집에서 지냈기에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감기에 옮을 일이 없었다.


그러나 첫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유행성 감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어린이집 가기가 무섭게 바로 심한 감기에 걸렸다.


40도가 넘는 열과 끊임없이 나오는 콧물. 가래 끓는 기침.

거진 일주일 동안의 심한 감기로 입이 쓴 지 밥도 거의 먹지 못했고 어린이집도 가지 못했다.

매일같이 소아과에 가서 차도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첫째의 감기가 조금씩 나아갈 무렵,

생후 60일이 갓 넘은 둘째가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누나와 똑같은 감기 증세를 보였다.

누나에게 감기를 옮은 것이었다.


그래도 만 4살이 다 된 첫째와 다르게 이제 신생아 딱지 겨우 뗀 둘째가 심한 감기에 걸리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가래가 가득 차 숨 쉴 때 쇳소리가 나고 온몸으로 기침을 하는 둘째를 보니 정말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맘이 간절했다.

누나한테 옮은 감기로 생후 두달 무렵 열이 40도 넘게 올랐다. 그저 열내리길 기도하며 밤새 몸에 미지근한 물을 적셔줄 뿐. 그렇게 밤새 부자는 열과의 사투를 벌였고, 이겼다.


우리 가족 모두의 간절한 맘이 하늘에 통한 것일까.

다행히 작디작은 둘째는 너무나 큰 고난이었을 감기 바이러스를 마침내 이겨냈다.






네 번째 복병, 줄어들 줄 모르는 야속한 몸무게


누가 모유 수유하면 살 빠진다고 했는가.


임신 후 18kg까지 늘었다가 아이 몸무게 포함 6kg 정도 빠진 후 61kg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모유수유를 하니 오히려 허기진다. 먹을게 땡긴다.

먹을 걸 줄이자니 모유가 줄까 봐 걱정된다.


결과적으로, 난 1년 전보다 10kg이 늘었다. 젠장.


출산 후 어느 정도 부기(살인가?)가 빠진 후 복귀하길 원했지만, 현실은 임신 중에 입었던 임부복을 그대로 입고 복귀. 원래 몸무게로 돌아가는 것은 과연 가능하긴 할까.


아직 붓기라고 믿고 싶다...






엄마에게도 아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두 아이의 엄마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날들을 겪어가며 하루하루 더 단단해져 간다.


엄마만을 바라보는 두 아이가 있기에,

엄마는 속이 새카맣게 탈지언정,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이 힘들지언정 겉으로는 평온하고 침착하다.


'엄마'라는 울타리 안에서 두 아이가 불안감을 느껴서는 안 되기에.

그 울타리 안은 어느 곳보다 따뜻하고 편안해야 하기에.

 

그런 엄마에게도 그저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 뛰어놀던 아기 시절이 있었다.


엄마에게도 아기였던 때가 있었다.


삶이 고될 때, 넘어야 할 고난들에 힘겹고 지칠 때,

엄마도 때로는 아기가 되고 싶다.


그저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던 그때로, 아무런 걱정도, 복잡할 것 없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엄마도 엄마의 울타리가 불쑥불쑥 그립다.






그런 엄마에게도 울타리는 있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무게는 너무나 크다.

거기에 더해 내가 하고 있는 변호사라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문득 삶이 참 고달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를 지탱해주는 곳이 있었다.

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점점 더 단단하고 풍요로워져간다.


그 울타리에서 나는 아기처럼 그저 따뜻한 품에 안겨있지는 못하지만,

세상의 무게를 함께 나눠지며 평생을 함께 살아갈 사람이 있다.

아내로서의 부족함을 보듬고 채워 줄 사람이 있다.

평생 내 편이 되어줄, 나부터 걱정해 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오랜 기간 함께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이 있다.

그런 남편과 딸, 아들이 있다.


그래, 삶의 무게를 많이 짊어진 나에게도 울타리가 있었다.

새삼스레 마음이 따뜻해지고 든든해진다.


우리 가족의 앞날에 생각지도 못하는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두렵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결국 함께 견디고 단단해지며 더욱 깊고 풍부한 행복한 삶을 살아낼 것을 알기에

두렵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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