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윤 변호사 Mar 22. 2020

말의 묵직함은 그대의 삶에서 비롯된다.

삶을 돌아보고, 보다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한 계기는 필요하다.

“해인아, 이제 핸드폰은 그만 보자”

한동안 내가 첫째에게 많이 했던 말이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첫째는 나에게 쏴 붙인다.

“엄마도 보잖아! 왜 나만 보지 말라 그래!”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중에도 끝내지 못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하거나 일과 관련된 파일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걸 보고 첫째는 단순하게 ‘엄마도 핸드폰을 보니 나도 보겠다’는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핸드폰으로 일을 한다는 개념을 모르니, 엄마도 핸드폰 보고 논다고 생각할 수밖에.    

 

대략 이런 모습..


안 되겠다.

어차피 애들 보면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면 미련 버리고 접자.

그리고 아이들과 있는 순간에 집중하자.

그래서 최근부터는 저녁 8시 이후에는 우리 가족 모두 핸드폰을 보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했다.

     

첫째가 내 눈치를 보며 핸드폰을 슬쩍 또 보려고 한다.

(하이톤으로)“해인아, 엄마도 핸드폰 안 보는데? 엄마는 더 재미있는 거 해야지~ 와! 이 책 진짜 재밌네! 으하하하~~ 와 진짜 웃겨!”

현란한 오버액션으로 첫째의 핸드폰에 대한 관심을 흩트리며 전도연급 연기력을 발휘한다.

그러면 첫째는 어느새 핸드폰을 잊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궁금해하며 내 옆으로 와 살며시 앉는다.     

그 자리에서 몇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보면 카톡 메시지가 몇백 개가 쌓여있고 부재중 전화도 상당하다.

어쩔 수 없다. 세상 무슨 일이든 다 얻을 수는 없는 법.   


  




한때 ‘독서경영’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가 있었다.

지인들의 경험을 통해 독서경영을 도입하여 직원들에게 매주 책 한 권을 선정해서 독후감을 쓰게 했던 소규모 회사 두 곳의 상황을 비교해볼 수 있었다.


비슷한 내용으로 시작했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일단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독서를 하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원들로서는 독서와 독후감 작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느낄 수 있다. ‘무슨 학교도 아니고 독후감을 쓰라고 해?’ 라며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회사의 대표는 어느 날 갑자기 전 직원에게 메일로 ‘이번 주부터 독서하고 독후감을 쓴다. 독후감 분량은 3장 이상, 금요일까지 대표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라는 내용의 통보를 하는 것으로 독서경영을 시작했다.

그 메일을 본 직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지금 당신이 느낀 그대로다.


대표는 직원들이 금요일마다 제출하는 독후감을 확인하고 끝.

"아니, 내가 이런 걸 느끼라고 이 책을 읽으라고 한 게 아닌데!"라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직원들로서는 매주 억지로 숙제하는 것 같아 고통이다.

읽으라고는 하는데 그 책을 왜 읽는지 모른 채 그저 독후감을 쓰라고 하니까 쓴다.

그마저도 대표의 입맛에 맞게 쓰려다 보니 잘 안 써진다.


대표로서도 불만이다.

직원들 생각해서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신경 써줬더니 고맙게 생각하지는 못할지언정 싫은 티 팍팍 낸다며, 이래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냐며 혀를 끌끌 찬다.

 

이 회사는 결국 얼마 못가 자칭 ‘독서경영’을 그만두었고, 오히려 대표와 직원 간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하고 업무 분위기 또한 침체되었다.

이로 인해 퇴사를 한 직원까지 생겼다.


다른 회사는 어땠을까?

대표는 일단 직원들에게 ‘독서경영’의 취지, 그리고 대표 자신이 책을 읽고 변화된 점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함께 동일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되 독후감의 형식이나 양에 제한 없이 자신이 느낀 점들에 대해 정리하도록 했다.


그 후 대표를 포함한 전 직원이 모여 각자 정리한 독후감을 토대로 책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고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처음에는 달갑지 않던 직원들도 대표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 번도 빠짐없이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모인 자리에서 점차 수다 떨듯 서로의 생각들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자 점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 회사는 이후 직원이 자발적으로 책을 추천하고 책을 통하여 떠오른 아이디어를 일에 접목시키는 수준까지 이르며 더욱 역동적으로 직원 개개인과 회사의 역량을 높여나갈 수 있었다.

     

두 회사의 확연한 결과 차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상하관계를 전제로 그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가 먼저 자신의 독서 습관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함께했다는 점이다.     


꾸준한 독서습관을 통하여 삶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냄으로써 독서의 필요성을 증명한 대표.

그런 대표가 적극적으로 직원들과 함께 독서를 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을 추진하는데 직원들이 신뢰를 가지고 따를 수밖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한평생 살아온 '시대의 어른'으로 불리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의 말은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묵직하게 우리 맘을 울린다.

반면 선거철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온갖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정치인들의 말에 우리는 코웃음 친다.     


최근에 찾아간 길상사에서 마주한 법정스님의 말씀. 이 간결한 말씀 안에 그분의 삶이 오롯이 녹아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주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전에 나부터 돌아보자.

나는 그 조언에 걸맞은 삶을 살아왔는가?


그러한 삶을 바탕으로 한 조언일 때 비로소 상대방은 당신의 진심을 느끼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그 조언의 내용이 고스란히 녹아든 당신의 삶을 배울 것이다.


조언과 맞지 않는 삶을 살면서 남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어떨까?

아마 상대방은 당신에게 “네, 조언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

‘자기 자신도 못하면서 남한테 무슨 조언을 해?’

그리고 앞으로 당신의 말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조언을 가벼이 할 수 없고, 가벼이 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나부터 그러한 삶을 살아야 내 말이 묵직한 힘을 가지게 된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한편으로는 고된 일이다.

내 삶의 상당 부분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한데, 아이는 엄마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아 답답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다.     


‘이 아이를 우짤꼬...’

혼자 놀고 있는 첫째를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르친 적도 없는데 내가 일하는 걸 언제 유심히 봤는지 내 책상 위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타자를 아무렇게나 두드리며 신나게 논다.

내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 볼터치를 하고 립스틱을 바른다.     


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이는 누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의 삶을 거울삼아 스며들듯 배워가는 존재임을.   

  

그 후로 육아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됐다.

아이가 부모의 삶을 통해 배워나가고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아이와 함께하는 동안 내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고 잘못된 점들을 교정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꼭 갖췄으면 하는 마음가짐이나 습관을 나부터 가져나가자.

육아를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에 맞게 내 삶을 바꿔나가고 습관화함으로써

나뿐만 아니라 나를 보며 자라날 우리 아이들이 함께 옳은 방향으로 커나가는 값진 기회라고 생각하자.     


이런 생각에 다다르니 육아가 더 이상 희생과 부담이 아닌,

내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변화시켜 줄 귀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우리 아이들 아니었으면 내 삶을 기본부터 점검하며 잘못된 부분들을 확인하고 고쳐나갈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첫째와 함께 읽는 책들이 새롭게 읽힌다.

나는 이 동화책에서 말하는 바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내 삶들을 계속 돌이켜보면서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들여다본다.

그리고 바꿔나가며 이를 몸에 익힌다.

나의 바뀌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자라게 될 것이다.


한 번은 해인이와 게임을 했다.

계속 엄마가 이기니까 울면서 짜증을 낸다.

이번에는 엄마가 계속 지는데 엄마는 “괜찮아! 또 하면 돼”하고 무덤덤하게 넘긴다.     

그 후 언젠가 집에서 일을 하던 중 실수로 글을 작성하던 파일을 날려먹었다.

“에이씨!!!” 본능적으로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는데 어느새 해인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말한다.

“엄마,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뭐!”     


이렇게 엄마도 자라고 아이도 엄마를 거울 삼아 자란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우리 가족 모두 추구하는 바른 삶에 가깝게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닮아 있으리라.     


그렇게 깊고 풍부한 삶을 만들어가면서

삶의 난관에 부딪친, 그때는 많이 컸을 우리 아이들에게,

삶의 다양한 고난들로 주저앉아 설 힘을 잃은 사람들에게

부족하나마 진심 가득 담긴, 삶에서 우러나오는 나름의 묵직한 조언을 건네줄 수 있는

그런 농익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계기는 만들기 나름이다.

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육아를 그 계기로 삼았듯. 당신에게도 그런 계기는 분명 있다.

당신은 어떠한 삶을 원하는가?

그러기 위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당신은 타인에게 어떠한 존재가 되고 싶은가?


당신이 살아온 그 삶이 당신의 말의 무게를 결정한다는 것을 부디 잊지말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와 어른을 대하는 방식은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