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가 입고 싶을 땐 어쩌지
더운 날일수록 긴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한다. 사막에서 긴 흰색의 옷을 입는 것처럼.
나는 열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 말을 듣고도 짧은 옷만 입고 다녔다. 그러다가 긴 옷의 필요성을 체감한 날이 있다.
내 모토는 여름엔 바다, 겨울에도 바다이다. 체력이 별로고 땀나게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거기에 벌레까지 싫어한다면? 등산은 연례행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짝궁은 바다든 산이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에 가기로 했다.
새하얀 모래사장이 밟고 싶어서 동해에 가자고 했다. 속초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았다. 여름의 대한민국은, 집 앞 편의점에 가는 것조차도 귀찮고 힘들었지만 바다라면 말이 달랐다. 평소에 약속을 준비하는 것보다 의욕적으로 일정을 짰고 내 적극적인 모습에 짝궁도 덩달아 신이 났다.
전 날 같이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둘 다 잠이 많은데 비몽사몽간에 짐을 챙겨 버스를 타려니까 정신이 없었다. 고속터미널까진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갔다. 버스에 앉아 각자 에어팟을 꽂았고 그러자마자 잠에 들었다. 중간중간 잠에서 깨면 장난을 치기도 했다. 벨소리에 예민한 걸 알아서 일부러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해 잠을 깨웠다. 크게 놀라지도 못하고 푸드득하며 깨어난 그를 보며 숨죽여 웃었다. 내가 당한 건 엄지와 검지 사이에 물고기를 그리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야 발견했고, 잘 키워달라는 말에 바다에 가서 꼭 풀어주고 오겠다고 했다.
도착한 강원도는 역시 더웠다. 얼음 조각이 곳곳에 놓여 있어 신기했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출발했다. 뭘 먹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그냥 그런 맛이었나 보다. 더워서 연신 손부채질을 하고 물을 마시면서도 우리는 강원도에 왔다는 설렘을 즐겼다.
지도 앱을 보며 버스를 타고 열심히 걸어서 바다에 도착했다. 가끔 바다에 가고 싶을 때마다 집 화분 위에 있는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어보고는 했는데 역시 실제 바다소리와는 달랐다. 바다소리는 쏴아아 하는 큰 파도소리와 바삭바삭한 모래소리, 웅웅대며 들리는 주변 사람들 소리가 함께 있다. 여기에 간혹 갈매기가 까악거린다. 파라솔을 대여해서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바다가 움직이는 걸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눈을 감고 앉아 파도소리를 듣기도 했다.
- 들어갈래?
옷이 젖는 걸 싫어해서 고민했지만 발이라도 담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너는 다 들어가. 난 발만 담글래. 라고 말하고 같이 바다로 갔다. 바닷물은 잠깐 차가웠고 엄청 시원했다. 한참 같이 물장구를 치다가 수영하고 싶대서 나는 좀 더 걷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모래 위에 철퍼덕 앉았다. 다리로 까슬까슬한 모래가 느껴졌다. 모래찜질이 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하면 싫어할 거라서 발만 묻어뒀다. 가방을 끌어와서 그림을 그리고 사진도 찍었다. 짝궁은 나와 바다를 왔다 갔다 하며 싱글벙글했다. 두어 시간쯤 지나 헉헉거리며 오길래 수건을 던져주었다. 재밌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어 보이는 얼굴에 나도 기분이 좋아서 같이 웃었다.
슬슬 배가 고파서 씻고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짝궁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나는 굳이 안 씻어도 되는데~ 라며 놀리고 있었는데 일어나며 끌린 엉덩이 사이로 모래가 다 들어왔다. 으악! 하고 소리 지르는 날 보고 짝궁이 깔깔 웃었다. 다리를 움직여서 모래를 터는데 한 무더기가 나왔다. 나더러 놀려서 벌 받은 거라고 했다. 아침에 긴 바지 입으랄 때 입지 그랬냐는 말은 덤으로. 모래 들어갈까 봐 그런 거 아니고 탈까 봐 그런 거였잖아, 썬크림은 잘 바르고 왔다구. 바지를 끊임없이 털며 대답했다. 아이씨 나도 씻어야겠네. 그럼 안 씻으려고 그랬어? 짝궁은 악 더러워! 라며 추임새를 넣곤 가방을 챙겼다. 어이가 없어서 가방을 챙기는 등을 한 대 때렸다.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소리 지르는 애를 질질 끌고 숙소로 왔다. 오는 길에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밤바다 보는 걸 좋아해서 부러 바다 가까이 숙소를 잡았었다. 그리고 남들이랑 부대끼며 씻는 걸 싫어하는 나에겐 최상의 선택이었다. 짝궁을 먼저 씻겨놓고 나도 씻고 나오니까 이불 위에 엎어져서 졸고 있었다. 그냥 같이 누워서 잘까 했지만 더 늦으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건 편의점 컵라면 밖에 없을 거란 생각에 후다닥 깨워서 밖으로 나왔다.
이따 밤에 바다 보러 나올 거지? 응. 그럼 좀 자고 그때 밥 먹지. 그때 나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해. 그건 그렇지. 둘 다 슬리퍼를 끌며 터덜터덜 나왔다. 번쩍번쩍한 조명 아래에 가게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항상 메뉴를 정하는데 오래 걸린다. 어차피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서너 바퀴 돌면서 가게 구경이나 하다가 맘에 드는 데 들어가자고 합의를 봤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걷는 것도 좋았다.
어, 뭐야. 왜? 긴 바지 입었네? 응, 왜. 짝궁이 또 웃었다. 진작에 자기 말 좀 잘 듣지 그랬냐고 하길래 네 말 듣고 입은 거 아니라고 했다. 투닥투닥 싸우다가 적당한 식당을 정해서 들어갔다. 바다가 관광지인 여느 곳에나 있을 법한 식당이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먹는 식사만큼 맛있는 건 없어서 맛있게 먹었다. 나와서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랑 술을 몇 개 샀다. 불꽃놀이는 안 해? 응, 그거 환경오염이래. 봉투를 달랑달랑 흔들며 바다로 걸어갔다.
밤바다는 낮과는 또 다르다. 낮에는 햇살에 바다가 빛나고 물속이 투명해 보이지만 밤이 되면 수평선도 안 보이는 캄캄한 미지가 된다. 뒤에선 해수욕장의 조명들이 비치고 앞에선 작은 조명과 별이 떠다니는, 왠지 낮보다 조용한 파도소리가 나는 것 같은 밤바다를 좋아한다.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봤다. 옆에서 캔 따는 소리가 났다.
밤바다 좋지? 응, 좋다. 오길 잘했어. 그러니까 말이야. 이것저것 얘기를 하면서 과자를 먹었다. 내일 스케줄을 읊어주는 짝궁에게 다 좋다고 말했더니 맨날 그런 식이라며 핀잔을 줬다. 너나 나나 똑같을걸? 이라고 말하고 짝궁의 사진을 찍었다. 여행 갈 때마다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하나씩 사가는데 이 돈이면 제대로 된 필름 카메라를 하나 사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짝궁이 이제 들어가자고 말했다. 이번엔 손을 잡지 않고 일어섰다. 엉덩이만 대충 털어도 모래가 나오지 않았다. 그거 봐. 긴 바지 입길 잘했지? 이씨, 네 말 듣고 입은 거 아니라니까. 다시 봉투를 달랑달랑 흔들며 숙소까지 걸어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 아니라는 걸 상기했다. 그러니까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이 기억은 소라 껍데기에서 나는 소리가 바다소리라고 생각했던 내 착각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다녀온 지 꽤 되어 약간 희미해진 기억에서 발췌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쓰지 않은 부분도 있고 약간은 추억 보정이 되어 각색된 부분도 있겠지만 여름이 되면, 친구들과 여행 가자고 떠들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을 가지고 적었다. 이제 나는 바다에 갈 때 웬만하면 무릎까지 오거나 아예 긴 바지를 입는다. 어차피 물에도 잘 안 들어가고 바지 안으로 모래가 들어가면 얼마나 기분 나쁜지 체감했기 때문이다.
긴 바지를 입고 모래사장에 앉아있다가 그때 생각이 나면 걔 때문에 입는 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아니긴 한데, 그래도 괜히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