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결혼 생활을 10년 넘게 유지 중인 유부녀다. 남편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신혼 시절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당신이 나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중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화는 나겠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돈을 주고 성(性)을 사는 행위를 할 경우엔 어떠한 변명도, 재고의 여지도 없이, 당신과 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없다.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사람의 성을 돈 주고 사고파는 행위를 한다. 나는 이것에 대한 찬반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달갑지 않게 보고 있지만, 장단점이 공존하고 있는 사안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쾌락을 위해 사람의 성을 돈 주고 사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과는, 나는 살 수 없다. 그건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도 생각했기에 남편에게 결혼 초반에 ‘결혼 생활 가이드라인’을 안내한 것이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전과 달리 길어져서 이제는 백세 시대라고도 한다. 반면 우리는 대부분 이십 대 혹은 삼십 대에 결혼한다. 사람을 잘 모르는 나이에 한 사람과 평생 함께 살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인데,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더 많은 나이에, 몇십 년의 시간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일이 생길 텐데,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확률은 없을까? 물론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평생을 약조한 사람이 있으니 우선 정조를 지키는 것이 결혼한 자의 도리겠지만, 사람의 감정이 로봇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니 어려운 일… 아닐까?
흔히들 사랑에 빠지는 걸 ‘교통사고’라고 표현하지 않던가. 몇십 년을 더 살면서 예기치 못한 일은 충분히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감정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인가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는 방법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하는 예의. 타협점은 어딜까. 우리는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을까.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사랑을 응원하는 이유는 이렇다. 홍상수와 김민희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유명 인사다. 그들이 그들의 사랑을 숨기고 만나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 또한 그들의 사랑을 세상에 공개하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도 충분히 알 만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인터넷 세상의 여론이란 그렇지 않은가. 전후 사정을 떠나 돌팔매질하기 적합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홍상수 감독은 '처자식을 버린 나쁜 놈'이라는 표식이 찍힐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중적이지 않은 그의 영화가 아내와 자식을 배신한 감독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이고 나면... 환영은 커녕 불매 운동이 일어나지 않음을 감사히 여겨야겠지. 그가 그런 점을 몰랐을 리 없다.
배우 김민희는 자신이 그간 쌓아 올린 커리어를 모두 내던졌다. 여자 배우의 입지도 적고 좁은 한국 영화 시장에서, 유부남과의 연애 발표라니. 영화 ‘아가씨’로 배우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극찬을 받은 그녀였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셀럽이었던 그녀는 한국에서 다시 활동할 수 없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그 둘은 ‘선택’을 했다. 평생을 약조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저버린 행동을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긴 인생에서 누군가 사랑하게 되었을 때, 다시 시작할 자유는 우리에게 없는 걸까?
홍상수는 이혼을 선택했고 김민희는 경력과 탄탄한 미래를 포기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홍상수와 김민희를 보며 욕을 할까?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남편이 룸살롱에 다녀오는 건 봐줄 수 있지만, 사랑에 빠지는 건 싫다는 기혼 여성들의 이야기를. 나는 무척 놀랐다. 지금도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아이를 키우는 유부녀들이 모인 카페에선 심심찮게 그런 글을 발견한다. 남편을 돈 벌어오는 기계라 여기며, 참고 살라고 한다. 나도 아이가 있고 남편의 벌이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현실이고, 경제적인 뒷받침은 당연하고 아빠의 빈자리를 두고 혼자 육아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일상을 유지해야 하기에 잠깐의 일탈은 봐줄 수 있는 걸까.
다양한 사람, 다양한 가치관, 다양한 삶이 있기에 쉽게 말하기도, 결론내기도 어려운 문제다. 자녀가 있는 상황에서 이혼할 경우, 자녀에게 생길 정신적, 육체적 문제도 있기에 섣불리 선택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감정에 대해 너무 비판적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한정되어있고, 지켜야 할 도리도 물론 있지만, 무엇이 더 중요할지는 각 개인이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살다 보니 아닐 수도 있고, 사랑하지만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엮고 풀어내는 과정에서 여러 감정이 얽혀있으니 곱게 풀릴 일은 없겠지만, 매듭을 짓고 새 시작을 하는 가능성을 뭉개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엔 돈으로 유희를, 쾌락을 즐기는 유흥가가 많은 나라다. 미디어에서도 여자 끼고 술 마시는 장면을 쉽게 표현하고 나타낸다. 강남 한복판에 널려있는 룸살롱을 보며, 매일같이 주차되어있는 차량을, 사람을 보며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들보단 홍상수의 사랑이 더 순수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런 행위보단 사랑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은 뭘까. 신뢰를 지키는 것이 사랑일까. 일부일처제는 왜 시작된 것일까. 사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한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언젠가 둘째 아이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아빠 말고 다른 아빠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좋겠어?라고 물어보니 딸은 이런 대답을 했다.
“아빠 2, 아빠 3이 생겨도 아빠 1은 데리고 살아요.”
아이의 대답이 재밌어서 남편과 나는 웃었다. 가족의 범위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런 사회체제를 요구하는 것일까? 아이는 꼭 남녀가 함께 키워야 할까?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가족관계 구성도를 그려오라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가족을 가지치기해서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 과제였는데, 그 방식이 너무 빤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빠, 엄마... 만약 이혼가정이라던가, 가족이 없는 사람일 경우엔 이런 과제가 달가울까? 미혼모나 미혼부 혹은 게이나 레즈비언 가정은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하나? 가족의 구성이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을 했다.
미혼모가 아이를 키워도, 미혼부가 아이를 키워도, 어떤 가족 형태가 되더라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체계가 만들어지면, 우리도 조금 더 다양한 가족 형태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될까? 일부일처제가 사회 구성원을 양육해야 하기에 적합해서 만들어진 체제라면, 이제는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아이는 키우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아들과 딸이 커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조금 더 다양한 가족 형태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책임지고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한 사람과의 돈독하고 신뢰가 탄탄한 사랑이 정석이라면, 세상은 동화책에 나오는 세상처럼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으니까.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질 수 있으면 좋겠다. 문제는 회피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아직 경직되어 있다고 느낀다. 내 삶을 살아가는데 타인의 시선을 살피는 분위기. 내가 중심이 아닌,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사는 느낌이랄까. 나는 그런 사회 분위기가 싫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홍상수는 이 시대의 로맨티시스트다. 무엇이 정답일지 모르는 짧은 삶 안에서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선택을 했고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그의, 그녀의 용기가 놀랍다.
세상에 틀에 갇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비웃을 수 있는 그들만의 잣대가, 솔직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그 용기를 양분 삼아, 유책배우자로서의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지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