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나는 나를 허술하고 무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빈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잘 믿었다.
하지만 세상엔 속내가 다른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고, 그들에게 물린 후 눈물을 흘리며 쓰라린 상처를 곱씹을 때마다, 덜 떨어진 먹잇감처럼 보인 나를 질책했다.
‘이런 바보 멍청이.’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나를 어리숙한 사회 부적응자 취급을 했다.
나도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 A
A의회의 상냥한 주임님이 차를 주며 말을 건넸다.
”기자님, 처음 봤을 때 날카로워 보여서, 오실 때마다 긴장했어요.”
“...네? 제가요?”
의외의 말에 놀란 나는 오해라며 내 성향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했다.
어느 날 술을 함께 마시게 됐다. 팀장님과 주임님은 내 술잔이 비워지는 동시에 찰랑찰랑하게 채웠다.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 속에 나는 취하지 않으려,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 물을 한 컵씩 마셔가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갔다. 목청 높여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팀장님과 주임님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부끄러웠지만,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를 불렀다. 친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 더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B+C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회사에 다니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생긴다. 요즘 나는 출입처 사람을 만나면 어느 순간에 아쉬운 소리를, 어떤 방식으로 꺼낼까 고민하고 있다.
출입처에 갔다.
B팀장님은 평소 개그짤을 카톡 프로필로 해둬 내적 친밀감을 느낀 분이다. 회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박카스를 마시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눈을 곧게 바라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상상하고 연습했던 나는, “흐엉. 저 좀 봐주세요”로 대화를 마쳤다. 눈빛이 흔들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얼마나 웃겨 보였을까.
다행히 나의 이런 모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일으켰나 보다.
B팀장님은 자기 선에서 해결해 줄 수 있노라며, 올해 안에 좋은 소식을 주겠다고 했다.
C팀장님은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몸매에 날카로운 이미지, 몇 번의 무딘 언행으로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낸 분이라, 접근하기 어려웠다.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겠지’ 자포자기하며 허공을 바라본 채 주절거렸다. 주절거림과 징징거림을 섞은 랩 같았다.
잠자코 듣던 C팀장님은 내 고충에 공감한다며, 아쉬운 소리, 여기서 연습 많이 하시라고. 그리고 자주 하셔야, 저희도 기억하고 챙겨드릴 수 있다며, 일단 밥이나 같이 먹자고 그 자리에서 점심 약속을 잡았다. 철옹성 같았던 C팀장님과의 첫 점심 약속이었다.
출입처를 나오며 나는 얼떨떨했다.
어째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데, 다들 친절해진 걸까.
뭔가 좀 부족해 보이지 않았나? 약점을 드러낸 것 같았는데... 혹시 이런 모습이 필요했을까? 이런 모습에 친근함을 느끼나?
어쨌든 나는 기뻤다.
나도 무언가 보답하고 싶다.
= ?
MBTI 심층검사를 했을 때, 나는 대부분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45:55라던가 40:60이라던가.
그래도 나는 나를 ‘ENFP’라고 생각했다. 충동적이고, 감상적이며, 기분의 높낮이도 크고, 어쨌든 엔프피.
가족들과 산책하며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비)웃으며 한마디 한다.
“무슨 소리. 당신은 ‘ENTJ’야.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는데.”
“에? 나 감수성도 높고. 충동적이기도 하고. 엉뚱하고 감상적인 사람 아냐?”
“그건 당신 글 쓸 때나 그렇지. 당신은 꽤 냉정하지. 기준점도 높고.“
옆에서 아이들도 한 마디씩 덧붙인다. “맞아, 엄마 무섭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가족으로부터 들은 내 모습은 또 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편으론 수긍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조금 변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일련의 사건들을 종합해 생각해 보며 심리상담할 때가 생각났다.
선생님은 내 첫인상을 ‘칼로 뚫어도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질긴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상담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라고. 긴 대화를 하며, 내가 지닌 내면의 여린 부분을 알고 나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상처받았던 지난 시간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어느샌가 질긴 갑옷을 입게 됐을까.
지나온 시간을 곱씹으며, 내 곁에 있던 당신에게 상처를 준 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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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꾸준히 좋아하는 개가 있다.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일본 사는 시바견. 존재 자체가 고마워, 일본으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바라보기만 해도, 나를 많이 웃게 하는 그녀는 나이가 많다. 최근 올라온 인스타그램 사진엔 털에 윤기가 많이 사라졌다. 죽기 전에 보러 간다, 보러 간다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차일피일 미루며 가지 않았다.
최근 눈에 띄게 울적한 나를 지켜보던 남편이 한마디 던진다.
“늦기 전에 00(내가 좋아하는, 일본 시바견) 보러 가지 그래?”
“됐어. 죽으면 죽는 거지. 개가 뭐 걔 하나뿐이야.”
“...“
”강한 척하지 말고, 늦기 전에 가서 보고 와“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강한 척하는 나를... 알아봐 줘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