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숲

by 전주영

어떤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오면, 나는 숲을 떠올린다. 핀란드 로바니에미의 깊은 숲. 그 속의 작은 오두막. 사방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고, 인적이 드문 숲의 집. 나는 그곳에 숨어 벽난로 앞에서 추리소설을 읽는다. 그 집엔 인터넷이 연결되어있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다. 외부와의 소통은 우편물과 유선전화를 통한다. 시내를 오고 다닐 작은 자동차가 한 대 있다. 부엌 찬장 한편에는 캔 통조림처럼 오래 보관 가능한 저장 식품이나, 인스턴트 식품을 가득 채워야지. 프렌치며 미쉐린 빕 구르망이며 미식을 위한 욕망으로 가득 찼던 도시의 삶과 정반대로 통조림을, 주방에 서서 뚜껑만 연 채 숟가락으로 떠먹는 상상을 한다. 마르고 건조한 빵과 달걀 한 알 그리고 커피. 하루에 식사는 한두 끼. 최대한 간단하고 간결하게. 통조림 콩이나 햄을 가열하지 않고 먹으면 배가 아프려나?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비상약은 다양하게 챙겨야겠다. 어디서든 아플 때 혼자 있는 건 서러울 테니까. 페트병에 담긴 물은 하루에 한 병 기준으로 한 달 치는 비축해둬야지. 여차하면 차가운 눈을 그대로 입에 넣거나, 냄비에 담아 끓여 마셔도 될까. 땔감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 삼아 매일매일 만들어둬야겠다. 작은 나뭇가지는 모아서 끈으로 묶어두고, 굵은 통나무는 도끼로 잘라, 햇볕이 들면 잘 말려둬야지. 날이 잘 드는 도끼를 챙기고, 불 피우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책은 뭘 들고 가지? 한때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그땐 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었다. 그의 문장은 단순하고 알기 쉽게 쓰여 있으며, 무엇보다 자주 출간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쩌면 책을 써내려가는 기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보여주는 미지의 세계로 머릿속을 감싸면,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나 『7년의 밤』 혹은 『완전한 행복』도 좋겠다. 그녀의 글은 뾰족하고 대가 단단한 화살 같다. 단숨에 내 심장을 겨냥하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다. 한 번 잡으면 밤을 새우고서라도 다 읽고 자야 했으니까. 마음을 앗아가는 책이란,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자에게는 소중한 법이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깊은 밤에는 요 네스뵈의 소설도 좋겠다. 서슬 퍼런 칼날 같은 온도를 지닌 『스노우맨』 같은 책. 북유럽 사람의 시선과 감수성에 빠져, 숲에서 다람쥐나 사슴이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리는 소리라도 들리면 움찔하며 현관문을 바라보겠지. 아무래도 추위에 떨며 죽는 건 싫은데…. 침입자님, 나를 죽이려거든, 단칼에 숨을 거둬주세요.

『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마음이 불안해지면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나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어야지. 영원이 지난 뒤 눈을 떴지만 그림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지루한 시간을 이겨낸 키르케나 차별을 무시하고 늪지에서 홀로 씩씩하게 성장한 카야의 기지와 강인함을 흡수해 두려움을 잠재워야지. 책은 얼마나 들고 갈 수 있을까. 들고 간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시내에 나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가득한 책을 사도 나쁘지 않겠다. 나무로 만든 재생 종이의 질감. 손으로 매만질 때의 매끈한 그 감촉과 종이의 향이, 그 자체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 테니까. 책은 대한민국에서 멀리 떨어져나와 숨은 숲에서 또 하나의 도피처가 되어줄 수 있다. 외로움과 고독을 피해, 나를 숨겨줄 작은 세계. 내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되, 그 어떤 상처도 주지 않을 친구.

마흔이 되는 생일에는 배낭에 초콜릿과 위스키 그리고 샴페인을 담아 오로라를 보러 가야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광경 아래에서 목 놓아 울어야겠다.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음을 토해내면…… 그땐 무언가 다시 채워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 수 있을까. 책에는 그런 게 나오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Out of control : Addi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