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의 유예

by 전주영

나의 침묵은 시위가 아니다. 그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안에서 맴도는 단어를 삼킬 뿐이다. 뾰족한 단어를 사탕처럼 입에 머금고 동글동글해질 때까지 굴린다. 콸콸 흐르는 강물 같은 감정을, 입을 꾹 닫아 댐처럼 막는다. 가끔 수위 조절에 실패하여 휘몰아치는 감정이 눈으로 넘쳐흐르면 난감하지만, 손등으로 눈물을 스윽 훔쳐내면서도 침묵의 품위를 지키는 데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당신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인지 곱씹으며 함께한 시간과 관계의 밀도를 떠올린다.


‘나는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결론에 다다르면 용암처럼 뜨거운 감정을 적당한 온도로 낮추기 위해 ‘쉼표’가 필요하다. 침묵은 당신에게 작별을 고하지 않기 위한, 관계의 마침표를 유예하고자 하는 일종의 숨고르기 시간이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던 천둥벌거숭이 같은 시절에는 다양한 감정을 바깥으로 내던졌다. 될 수 있는 한, 내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상세하게 설명하려 노력했다. 서로가 이해받고자 꺼냈던 수많은 단어 사이 속에서, 어떤 단어들은 화살이 되어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날들엔 많은 관계가 탄생하고 또한 쉽게 소멸했다.

입안으로 뜨거운 감정을 삼키고 나면 기분은 자연스레 가라앉는다. 이해받고 싶은 욕망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하는 사이, 푸른 잉크처럼 번지는 우울함은 성난 파도처럼 나를 잠식한다.

천둥 번개와 돌풍을 동반한 거센 비처럼 감정이 주체하기 힘든 날에는 약물을 이용해 감정을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내게는 약간의 수면장애가 있어, 수면제 몇 알 정도는 주방 찬장에 비상약처럼 보관하고 있다. 복용하면 30분 이내에 잠들 수 있기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붙잡고 읍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찬장을 뒤적거린다. 흉한 모습을 보일 바에야 약을 먹는 방법을 택한다. 수면제의 장점은 느리게 흘러가는 괴로운 시간을 일곱 시간 정도 소멸시킨다. 잠드는 과정은 썩 유쾌하지 않다. 약효가 퍼지는 과정에서 동작이 조금씩 느려지고, 혀끝에 쥐 나는 느낌도 들며 입이 바싹 마른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잠에서 깨어난 후 반나절은 좀비처럼 지내게 되는 것도 약의 의존성과 더불어 단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럭저럭 감정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상태라면 영화나 소설, 웹툰 등의 도움을 받는다. 세상엔 뛰어난 창작자가 많고, 그들은 끊임없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생산해낸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 파묻히면, 내게 속해 있는 사건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다.

창작물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질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인터넷 뉴스의 댓글을 읽는다. 아무 생각 없이 댓글을 읽다보면, 다양한 사람, 다양한 생각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갖가지 인간 군상을 확인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다. 이해. 이해가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진짜, 이해.

그렇게 타오르던 가슴에 냉각수를 한바탕 들이붓고 나면, 입안에 머금었던 단어의 색과 온도가 변한다. 댐의 수위를 넘어 홍수가 날 것 같던 감정도 잔잔한 강물이 되어 있다. 메마른 사막처럼 건조하게 느껴진 관계에 어느새 풀이 한 포기 다시 자라 있다. 사람을 사랑하기란 왜 이리도 힘든 것인지. 누군가도 나를 위해 그런 순간을 마주하고 있을까.


나는 오늘도 쉼표를 세 번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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