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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Mar 26. 2021

갈등과 혐오의 시대, 말랑말랑한 연대를 꿈꾸다

우리가 잊고 있던 말랑말랑한 어린 시절 친구들에 관하여

믿고 싶지 않지만 여러 면으로 보나 나는 다 큰 어른이다. 운전도 할 줄 알고, 석사 학위도 땄고, 또 혼자 요리도 할 줄 안다. 잠을 자도 계속 피곤하고, 광고 전화가 와도 죄책감 없이 심드렁하게 끊어버릴 수 있는 것도 내가 어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내 베개 옆에는 어릴 적부터 나와 함께 한 인형 다섯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눈에 봤을 땐 이 인형들은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인다. 금발 파란 눈의 쌍둥이 아기들과 마시마로, 키위 새 그리고 로봇... 각기 다른 곳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온 내 인생의 동반자들이다. 이 이상한 조합은 나름의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의 기묘한 미소를 보면 분열과 혐오에 찌든 우리 어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아님 말고).


금발 쌍둥이 아기들은 리틀타익스(Little Tikes) 출신으로 이 공동체의 최고 연장자다. 어렸을 적 나는 이 쌍둥이가 서커스단 출신이고 밤마다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작은 솜털 주먹으로 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때린다고 상상했다. 우리 가족은 이 인형들이 백인의 신체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매우 최근에야 깨달았다... 어린 나와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이들의 노란 머리와 파란 눈을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친구들은 '예솔'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얻게 되었다. 왜 내가 똑같이 생긴 인형 두 개를 갖게 되었는지 가족들 중 아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면서 예솔이들은 우리 집에서 더더욱 불가사의한 전설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인종 따위 상관하지 않는 진정한 글로벌 시민인 우리 부모님께 박수를! 하지만 난 이제 '예솔'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00년대를 살아간 여느 한국 아이들처럼 나도 어느 날 마시마로 인형을 선물 받았다. 이름 짓는데 영 재주가 없던 나는 마시마로를 '마로'라고 이름 붙였다. LGBT에 이어 Q(퀴어), I(인터 섹스), A(에이섹슈얼),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알파벳의 향연이 당연시 여겨지는 지금과 달리 남자애들과 논다는 이유로 야유를 받던 그 시절 초딩의 감성으로 나는 마로의 귀에 빨간 리본을 묶어 정체성의 혼란을 사전에 예방했다. 눈사람 모양의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으로 마로는 순식간에 내 최애 인형이 되었다. 나는 마로가 사실 외계 토끼 행성에서 온 과학자고 지구에 불시착했을 때 내가 구해줘서 같이 살게 되었다고 상상하곤 했다.


마로는 내게 구조된 뒤로 쭉 내 베개 옆에서 생활하고 있다. 과학자였던 경험으로 아직도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보라색 키위 새는 아빠가 뉴질랜드에 출장을 다녀오실 때 데리고 오신 인형이다. 난 이 친구를 '모브'라고 이름 붙였는데 털이 모브 색(mauve)인 것과 별개로 내가 그 당시 새로 배운 단어라서 가족들한테 멋져 보이고 싶었던 게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내가 상상한 모브는 부끄럼이 많고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키위 새다. 내가 자다가 침을 흘려 모브를 세탁기에 넣어야 할 때마다 아빠가 모브에게 아저씨 때문에 먼 타지에서 고생이 많다며 정중하게 사과하시곤 했다. 모브와 마로는 절친이고 나와 긴 여행을 같이 떠나기도 했다.


모브가 책을 읽을 수 있게 눈 주변 털이 눈을 가리지 않도록 정리해주는 것이 한동안 내 일과였다. 모브는 내 전공 서적을 읽는 것을 즐긴다.


마지막으로 카툰 네트웍스의 수작 '어드벤처 타임'의 주인공 중 하나인 비모 인형이 있다. 비모는 이 공동체에서 가장 어리지만 덩치는 제일 크다. 아직도 숙면을 위해 내가 안고 자는 인형이기도 한데, 너무 퉁퉁해서 여행 갈 때 데리고 가기 힘들 때가 있다. 비모의 성격은 용감하지만 지나치게 고집이 센 원작 만화 속 비모의 성격과 똑 닮았다. 아직 어려서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비모가 바라보는 세상은 현실과 조금 다르다. 그래서 예솔이들과 마로, 모브는 비모를 아끼지만 걱정하기도 한다.


네모 반듯한 본체가 비모의 가장 큰 자랑거리지만 내가 계속 안고 자서 점점 둥글게 변하고 있다...


이 다섯 친구들은 사랑과 보살핌, 포옹, 그리고 다들 한 번씩 밤에 내 침 테러(...)를 받아 생긴 집단 트라우마를 기반으로 자신들만의 연대를 결성했다. 베개 옆에 앉아 있는 내 인형 친구들을 볼 때마다 새랑 (외계) 토끼가 친구가 되고 백인 쌍둥이가 어딘가 부족한 로봇을 돌봐 주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인종은 물론 생물 종(種),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넘는 포스트 휴먼 공동체가 바로 내 침대 위에 존재하고 있던 거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어린 시절 추억이 있을 것이다. 동물 인형들과 플라스틱 미미 인형들이 같이 식사하고, 강아지 인형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사자와 원숭이 인형이 진찰을 받던 세상. 털북숭이 인형이 변신 로봇과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뤘던 세상이다.


가끔 이렇게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불가능한 것이 없었던 말랑말랑한 연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가 가지고 놀던 인형들과 장난감을 보면 갈등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협동과 협업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뭐, 당장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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