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 책을 비밀스럽게 쓰고 있다. 가족조차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요즘 한 번씩 한영 번역을 하고 있는데, 번역 중인 책의 원작자에게만 귀띔을 한 상태다. 주변에는 이 책이 잘되고 적당한 수입이 나오면 알리려고 한다. 사람들이 지금 내가 책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직 나이도 어린놈이 무슨 책을 쓰겠냐며 내가 짧지만 20년 조금 넘게 살면서 한 생각과 관찰 등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은 알지도 못 한 채, 나에게 힘들게 대학 가 놓고 철없이 공부 안 하고 허황된 꿈을 좇는다고 잔소리하며 각종 태클을 걸어 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2017년 스무 살에 시골 고시원에 재수를 하러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1월에 들어간 고시원을 10월에 나오며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모델이 되겠다고 했을 때. 평발에다 무릎과 허리까지 좋지 않은 내가 준막노동 성의 발전소 정비보조 일을 하며 모델 아카데미 학원비와 여드름 흉터 치료비 및 자취방 방세를 마련할 때. 시험용이 아닌 실용적인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인들이 많이 있는 영어 카페에서 토익보단 스피킹을 배우러 다니겠다고 했을 때. 모델 아카데미 수료도 하기 전에 모델 대회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재수하고 다음 해였던 2018년에 대학교육과 대학생활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입 준비를 할 때,,,,
축구에 빗대면 모두가 스탠딩 태클, 백 태클, 사이드 태클, 슬라이딩 태클 등 각종 태클을 걸며 내 실패를 바랐고, 나를 무시했었다.
나는 중고생 때부터 도전적인 성향이 컸지만, 당시에는 용기와 지식이 부족했다. 내 가슴이 시킨 선택에 수반되는 부정적 결과를 책임 질 자신이 없었던 거다.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공부에도 과욕을 부리곤 했다. 그 덕분에 모델과 학생이라는 방향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진로 사이에서 오랫동안 망설였고, 고교 졸업 후 재수를 할 때까지 순순히 사회가 시키는 삶을 따랐다.
하지만 고3이 되고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내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스스로 인생을 설계해가는 중이었다. 대입의 문턱에서 이대로 계속 사회가 시키는 삶을 살다가는 나중에 후회하며 다시 되돌리려 해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교실. 선선한 봄바람이 불었다. 우리들은 하복을 입기 시작했다. 짧은 옷차림으로 점심시간에 축구하는 또래 친구들. 축구장 테두리를 따라 걷거나 축구장 옆에 딸린 농구장에서 농구하는 학생들. 그리고 야외 스탠드(계단)에 앉아있던 학생들을 보는데 그 날 따라 유독 그들이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우리 교실은 학교 건물 5층이었다. ‘ㄱ’ 자 학교 건물의 세로 부분에 우리 교실이 있었다.
창밖으로 학생들이 운동장과 스탠드, 농구장 등에서 점심시간을 만끽하며 지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1년 후에 성인이 되어 흩어질 우리의 미래를 그려봤다. 학교라는 틀 안에 박힌 채, 아무것도 모르고 놀고 있는 친구들은 어른들이 말하는 무서운 사회에 나가기까지 채 1년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려본 우리의 미래는 유난히 맑았던 그 날의 하늘과 대비되었다.
나는 이 틀에 갇혀 사회가 지시하는 평범한 길을 걷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또래 학생들이 불쌍해 보였다. 내가 봤던 점심시간을 만끽하던 학생들은 사실 마냥 노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전 내내-1, 2, 3, 4교시에-열심히 공부하고, 다시 5, 6, 7, 8 교시 후의 짧은 석식시간을 보낸 다음, 야자까지 집중해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한 에너지를 비축할 겸, 스트레스도 풀어줄 겸 해서 나가 있던 것이다. 나도 같은 이유로 점심을 먹고 나서 창밖을 보며 사색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하면 그것이 축복인 줄 아는, 좋은 대학을 가도, 좋은 직장을 가도, 노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 친구들이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누구나 다 좋은 대학을 바라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노력한다면 목표했던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각자의 시간과 노력에 배신당한 느낌이 들 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들을 참아가며, 때론 중요한 것도 포기하고 노력해도 배신당할 확률이 큰 게임이다. 우리는 정말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군중심리’ 때문이다. 우리는 공부 외에 기성세대가 뚫어 놓은 다양한 길을 이용하려 하기보다는 그들이 젊었을 때 목숨 걸고 출세하려던 길을 똑같이 파고 앉았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세계에서 달라지고 인식이 바뀌고 있다. 직종도 다양해지고 생활 방식도 다채로워졌다. 그런데 30~40년 전과 같은 길을 파겠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른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가장 쉽지도 않고 가장 안전하지도 않은 그저 보편적인 선택일 뿐인 공부에만 열중하는 내 모습이, 또 그걸 알고 있는 나조차 공부에 목숨 걸게 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용기 없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창밖을 계속 바라보다가 점심시간이 종료되는 종이 울릴 때쯤, “우리들은 좀 더 나은 노예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거다.”라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 밤늦게 학교에서 나오고, 학원으로 가서 자정까지 공부한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씻고 잠들기 전,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나는 고3 때, ‘공부를 잘하면 성공하고 못하면 망한다’고 얘기하는 세상에서 (내 의사나 재능과 상관없이 미래가 정해진 그런 곳) 벗어나려면 그때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당시 중1 때부터 가슴속에 꼭꼭 숨겨둔 진짜 꿈이던 ‘모델’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어렵게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정보를 좀 알아볼 테니 기다려보라고 하셨다. 난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 뒤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눈에선 수업이 진행되는데 머릿속에서는 나의 먼 미래 이야기가 재생되고 있었다. 어느 날, 야자가 끝나고 학원을 가지 않았다. 밤 10시에 곧바로 집에 왔다. 난 고3 때 종합학원과 수학 교습소, 이렇게 학원 두 곳을 다녔는데 그 날 따라 몸도 피곤했고, 종합학원 수업도 교습소에서 배웠던 내용 중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단원을 하는 날이라서 나에게 선물 준다는 느낌으로 학원을 쨌다. 그렇게 도착한 집에는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엄마가 방으로 불렀다. 평소 같으면 잘 갔다 왔냐고 먼저 물으시는데, 학원 가는 날 아니냐 라고만 물으셨다. 이유가 있어서 안 갔다고 하니까 그냥 넘어가셨다. 그러곤 먼저 방으로 들어가셨다. 뒤따라 들어간 방에선 문을 닫고 모델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공부를 접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현실에서 무산되었다.
19살 당시에, 모델을 시작하기엔 늦다고 판단했다. 지금 모델을 하다가 22살, 23살이 되어서 모델과 내가 맞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른다면,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있냐는 엄마의 물음에 정말 솔직하게 못하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도 잘할 자신은 없지만 이제 1년만 참으면 대학교를 수시전형으로 편하게 갈 수 있으니 대학부터 먼저 가자는 것이었다. 난 성적도 형편없지만 열심히 공부했던 세월이 아깝기도 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공부를 다시 해야 할 때, 이 짓거리를 다시는 할 자신이 없어서 다시 한번 그 꿈은 조금만 더 품고 있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접은 줄 알았다.
나는 열심히 했지만 성적은 중위권 정도밖에 유지하지 못했던 학생이었다. 그래도 수학을 제외하면 평균 중상위권은 했던 것 같다. 수학을 너무 힘들어해서 그냥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를 작은 공책에 옮겨 적어 들고 다니며 외웠다. 엄마 말로는 내가 잠꼬대로 이 문제들을 웅얼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때 정말 힘들었다. 고교 3년은 정말 지옥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내가 내 미래를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기억도 없다.
나는 매일 수업시간 외의 자습시간 8시간을 확보하며 지냈고, 그중 매일 5시간 이상을 수학에 투자하고 남는 시간에만 다른 과목들을 공부했다. 그럼에도 내 수학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난 매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넘어, 쪽지 시험과 교과서의 한 단원을 마치면 각 단원 별 끝부분마다 있는 단원평가를 풀고도 절망하곤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100% 문과 성향이었지만, 취업이다 뭐 다해서 어쩌다 보니 고교 2학년 때 화학과 생물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학교 교육의 부적응자가 되었다. 그 전에도 한국 교육 시스템에 의심과 불만이 많았지만 그냥 참고 따랐다. 그리고 고2 때는 그 불만과 회의가 최고치를 경신했고, 누가 봐도 부적응자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나중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일명 ‘안정적이다’ 말하는 궤도에 진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열심히만 했지, 공부에도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미련하게도 첫 수능 직후 수험장을 나오면서 내 공부법이 단단히 잘못되었으며, 다른 공부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는 고3 때도 모델이 정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델이 되지 않았을 때,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쟤는 공부 못하는데, 키 크니까 그냥 모델하는가 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고, 내 꿈과 점점 멀어만 지는 공부에 사력을 다하며 견뎌온 시간이 억울했다.
지금은 이미 늦었고, 부모님과도 합의를 봤기 때문에, 정 하고 싶다면 나중에 하더라도 모델로서 실패했을 때, 잘 살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으려고 적성에 맞는 전공의 대학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사실상 당시엔 모델이라는 꿈은 아예 접은 상태였다. 그래서 선택한 내게 맞는 적성과 학교교육의 합의점을 찾은 곳은 ‘한의대’였다.
당시 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과 동시에 고3 6월, 재수를 결심했다. 비교적 앞자리였던 나는 수업 때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하기 수업 듣기 좋은 내 자리와 수업을 좀 더 잘 듣고 싶은 뒷자리 친구와 자리를 바꾸고 다른 문제집과 다른 과목들을 공부했다. 평소에 애살과 욕심이 많아서 늘 수업이 끝난 후에 질문하러 선생님께 찾아가며 공부했다. 그래도 성적이 좋지 않아서 선생님의 신임과 안타까움을 함께 받던 나는 그 일로 골칫덩이와 철부지로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선생님껜 죄송하지만 나에겐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내 진짜 꿈인 모델을 포기하고 선택한 대안마저 포기하기 싫었다. 내 바람과 달리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각종 비난과 미친놈 소리를 들었고, 어렵게 결정한 꿈마저 다시 이상과 현실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하나 고뇌했다. 이과생이라면 무조건 화학공학, 전기-전자공학, 기계공학 등의 취업에 유리한 공과대학이나 적어도 학과명에 '공'자가 들어가는 공대에 진학해야만 한다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말에 흔들려, 나는 일직선으로 가야 하는 내 길 위에서 지그재그로 걷게 되었다. 태클이 난무한 것이다. 그리고 난 그 태클에 속절없이 당해버렸다.
(내가 재수했던 시골 고시원 입구)
시간이 좀 지나고, 고3 수능 성적 발표가 났다. 나는 고3 여름부터 재수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해의 수능은 경험 삼아 보러 갔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고민 없이 찍었다. 특히 국어는 지문을 감상했고, 영어는 대충 읽고 풀었다. 시험지의 문학 지문을 감상해본다는 것은 정말 찢어지는 희열이었다. 그것도 수능 수험장에서.
나는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 난 다음날 아침, 경북 상주시 화동면 양지리의 팔음산 중턱에 위치한 시골의 고시원행에 올랐다. 고시원 시골길엔 분명히 차갑지만 따스한 눈이 쌓여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실패한다면 나는 공부를 못한다고 인정하고, 잘하면 좋은 것이라는 각오로 갔다. 나는 결과에 승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거기서는 아무 태클 없이 내 20살을 불태울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행복했다. 그래서 따스했던 것 같다.
(팔음산 고시원 바로 앞, 버스 정류장. 그 당시엔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하루에 2대밖에 없었다)
1월~10월 달까지 공부하며 나는 공부할 놈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인정한다. 나는 당시로부터 계속 5수를 했어도 서울대 입구도 못 갈 놈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난 무언가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큰 것 같다. 문학작품은 왜 분석해야 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시에 관한 문제도 시인이 자기 시의 문제를 틀리게 만들고 작가의 의도와 다른 선지를 정답으로 만들어 버리는 한국 교육에 반발심을 느꼈다. 나의 학교생활은 시간낭비였다. 재수해본 경험 덕분에 나는 나 스스로가 표준화되어 만들어진 공부만 할 수 있는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재수를 해봤기 때문에 내 꿈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나는 수능을 한 달여 남겨둔 채, 부산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부산 고향집으로 내려온 이후, 나는 집 근처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에서 정비 보조원으로 일하며 모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일이 없는 날엔 지하철로 1시간 거리의 영어카페를 가서 영어를 배웠다. 재수하고 막 나온 터라 머릿속의 빠삭한 문법과 단어 덕분에 하루하루 영어가 느는 게 느껴졌다. 일도 하고, 영어카페도 다니면서 모델이 되기 위한 다이어트를 8개월 동안 했다. 다이어트를 위해 출근하는 5일을 6시에 기상해서 헬스장을 들리고, 퇴근 후 저녁 8시에 다시 헬스를 가고 쉬는 날엔 영어카페를 가는 생활을 했다. 물론 가끔씩 아침운동을 빼먹은 날도 있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여드름 투성이었던 나는 피부과도 다니고 부산에서 YG kplus 모델 아카데미를 다녔다. 아카데미 3개월 과정 중 2개월 차에 처음 나간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그 해에 나간 3개 대회에서 모두 입상했다. (대상, Top 10, 은상; 대상을 받은 대회부터 순서대로 각각 70명, 500명, 300명 정도의 지원자가 있었다)
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 서울호서예술실용전문학교, The Look of the Year Korea, YG Kplus academy.
부모님을 통틀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바뀌었고, 대우도 달라졌다. 기쁨보단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당시 21살, 내 나이에 만나기 힘든 나이대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모델을 하면서 만났다. 영어카페에서 사귄 세계 각국의 친구들을 통해 내가 세상을 보던 창은 더 넓어졌고, 대학교육과 대학생활의 필요성을 느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대학에서 교육받아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의 내 생각은 또 다르다 = 휴학한 이유) 평소 언어에 관심이 많아 독학을 많이 했지만 늘 한계가 있었다. 자료수집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또래와 어울리고 놀면서 배우는 것도 살아가는 데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서울권 대학을 가겠다던 나에게는 또다시 다른 비아냥이 쏟아졌다. “꿈 깨라” “시간 낭비다” “지금 갈 거면 작년에는 왜 안 갔냐?” 등등.
원서를 쓰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 다니던 고등학교에 찾아갔을 때는 모델이 된 나를 반김과 동시에 내가 서울의 알아주는 대학교에 원서를 쓰겠다고 하니 “네가?”라고 하던 선생님도 계셨고, 이 선생님 때문에 나중에 한국외대에 붙고 나서 합격소식을 알리러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나는 고교 이과 출신에 생활 기록부의 장래희망란에 1학년 때 패션모델, 2학년에는 원자력 공학자, 3학년은 전자공학자라고 기입되어 있었고, 20살 때는 또래들이 독학재수 학원이나 대기업 교육 업체가 운영하는 N수생 전문 학원에 가는 것과 달리 하루에 버스가 2번 들어오는 경북의 산골 마을 고시원에서 재수했고, 10개월을 공부하다 그 해의 수능을 응시하지 않은, 21살의 모델이자 한국외대 독일어 통번역학과 지원자였다. 이런 나는 외대에 수시전형으로 합격했고, 합격 후, 시선은 다시 바뀌었다. 나는 이때에 살아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을 통틀어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구나.”
다른 사람 시선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나는 이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오롯이 나에게 미쳐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난 지금, 당시를 되돌아보면 느끼는 게 많다. 그중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게 있다. "꼭 그렇게까지 이기적이었어야 했던가"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당시 수험생이었던 동생에게도 미안하고 부모님께도 죄송하다.
하지만, 단단히 잘못되어 굴러가던 내 인생을 내가 정말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고, 정말 그랬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의 내 부족한 경험과 지식으로는 완강한 부모님을 절대 설득할 수도, 내 스스로 용기를 갖고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무식하게 덤비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쏟아부었고, 결과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어렵게 입학할 수 있었던 학교를 지금은 1학기만 다니고 휴학했다. 나중에 지금보다 더 넓어진 창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나를 위해 자퇴하지 않았고, 글을 쓰며 번역도 하고, 고등학생 때 다니던 학원에서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은 개인 사정상 번역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아웃렛 안전팀에서 일한다. 이제 곧 4개월 차가 되어간다. 슬슬 복학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걱정하며 화도 낸다. 정신 차리라고. 이 정도 하고 싶은 대로 말썽 부렸으면 된 것 아니냐고.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앞으로도 결과가 좋을 것 같냐고.
이들에게 내 계획을 설명하고 내 생각을 설득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난 지금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어차피 그들은 나에게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안정성을 추구하며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것이 현명하고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다. 오히려 내가 걷는 길 위에서 목표를 향해 가는 나를 지그재그로 걷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당신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하늘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효과를 보려면 자신의 눈만 가리면 되듯이, 당신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자신을 좀 더 나은 위치로 이끌기 위해선 수행이 필요하고 이 수행과정이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가 그럴듯하게 그려 놓은 길을 걷기 선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절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수행과정에서 찾아오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내가 만나고 연락하는 사람들에게 있었고, 이 스트레스의 근본적 원인은 ‘나’의 태도에 있었다. '내가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고 있느냐가 나에게 정말 많은 영향을 주는구나' 하고 느꼈고 이들의 반응을 지나치게 살피며 행동하는 내 모습에서 문제점을 찾았다. 아직 많이 부족한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부대끼며 지내기는 힘들다.
대부분 어른이 되면 직장생활을 한다. 직장에서 자신과 맞는 사람과만 다니고 지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내가 통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었고, 그동안 내가 너무 어렸고 많이 부족했던 탓에 실제 처한 상황보다 더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들었던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결국엔 당시의 고통들은 나를 성장시켜주었다.
그런데, 사실 그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난 후에는 후유증이 생겼다. 아는 게 없어서 너무 열정으로만 밀고 나가다 보니 가족과 건강, 친구라는 중요한 요소들에 많이 소홀했고, 건강이 너무 나빠졌다.
그래서 이제는 고통과 힘든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극복하고 이겨내려고만 하고, 나에게서만 문제점을 찾으려 했더니 알게 모르게 자존감이 깎여나가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완벽하지 못한 내 모습에 자꾸만 작아졌다. '힘든 시기든 행복한 시기든 그 흐름을 잘 타는 것'이 중요하다. 매 순간에 충실하는 것이다.
힘들 때, 그 flow(흐름)를 잘 타는 것은 서퍼들이 매서운 파도를 무난하게 타고 보내주듯, 성장통을 가장 쉽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flow를 타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면 결국 내면은 강화된다.
힘들어서 너무 죽고 싶을 땐, 억지로 무언가를 할 필요 없다. 그냥 그 시기를 무난하게 넘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가족들, 친구들과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니까. 그래서 내 건강이 중요하니까.
아프기만 하던 성장통이 알게 모르게 지나가고 나면 한 단계 더 성숙해진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힘들 때 시야가 좁아져서 멀리 그리고, 넓게 보지 못한다. 그래서 내 시계만 자꾸 느린 것 같다고 느낀다. 남들은 앞서가는데 나만 자꾸 뒤처지고, 이런 느낌은 무력감을 불러와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든다.
나는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고 느끼면 항상 되뇌는 말이 있다. 우리가 다 알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