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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진 불도 다시 보자 ; 나의 실패와 열정 이야기



<이건 그냥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입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내가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1년 휴학했을 때 썼던 글이니까, 2019년 가을에 썼던 글이다. 내 삶을 돌아보며 그간의 느낌과 생각을 정리하고 정렬하려 쭈욱 써내려 갔었다. 2017년 고3 때부터 글을 쓰던 2019년까지인 약 3년 간의 서사를 축약한 글이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다시 들춰보게 되는 나의 실패와 열정 이야기에는 ‘모델 이성진’이 빠져서는 안 될 것 같다. 덕분에 <이건 그냥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입니다>를 읽어 보았다. 대략 1년 반 전에 썼던 글에서 느껴지는 나의 감정은 모델과 연기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 듯했지만, 애써 외면하고 덮어둔 것 같다. 이번 훕라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면서 알게 된 점은 나의 진실인 것 같았다. 정리된 게 아니었다. 모델으로서의 ‘실패’는 맞지만,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연예인은 나의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꿈이었고, 본격적으로 중2 때부터 모델이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 꿈을 품고 살았다. 예고에 가려다 인문계를, 문과에 가려다 이과를 갔다. 많이 후회됐다. 첫 수능이 끝나고 바로 대학 가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팔음산 자락에 위치한 고시원에 들어가서 재수를 했다. 그리고 수능을 보름 여 앞두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과 울산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에서 정비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모델이 되기 위해 돈을 마련했다.


나는 SF 엔터라는 회사와 5년 전속계약 맺은 ‘모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산 촌놈은 모델이 되고 싶어서, 재수하던 중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사촌 형 자취방에서 4일 정도 신세 졌다. 당시엔 모델 에이전시가 얼마나 다양한지, 혹은 어떤 에이전시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보는지조차 몰랐기에, 일단은 유명한 SM과 YG와 관련된 모델 에이전시인 Esteem, YG K+ 회사를 무작정 문 두드리고 들어가서 모델이 되려고 왔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직원 분이 담당자와 미팅 날짜를 잡아서 알려주셨다.


YG K+에서 가장 상세하고 자세하게 상담해주셨다. 다행스럽게도 부산에는 YG의 모델 아카데미가 있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두 번째 수능을 보름여 앞두고 고시원에서 나왔다. 그렇게 3개월은 방에서 혼자 술 마시고, 아침에 자고, 가족들이 저녁 먹는 소리에 깨서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렇게 피폐해져 가다, 모델 아카데미 정규 class 모집 기수와 원자력 발전소 정비 보조원 모집 기간에 맞추어 원서를 모두 넣고 돈을 벌러 다녔다.


한 8개월을 아침에 공복 사이클 1시간과 웨이트 트레이닝 PT를 받았다. 출근해서는 닭가슴살을 먹고, 점심에도 단백질 도시락을 먹었다. 그리고 퇴근하는 길에 다시 헬스장에 들어가서 공복으로 사이클을 1시간씩 탔다. 가끔 몸이 부서질 듯 아플 때는 아침 운동은 쉬기도 했다. 일을 하루라도 안나가면 주휴수당을 못 받기에, 목표 금액을 채우려면 더 오래 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도 모으고 어느 정도 모델으로서 멋있는 몸을 만들고 나서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열심히 운동하고 식단 관리를 했던 덕분인지 아카데미에서 권고하는 운동량과 식단은 너무 쉬웠다. 매주 인바디와 키/몸무게를 체크하는 시간도 내겐 너무 설레었다. 기립성 빈혈과 음식물 섭취 후엔 늘 헛구역질을 달고 살았지만, 그냥 너무 행복했다.


이런저런 대회와 개인 브랜드 쇼, 광고 촬영 경험을 하면서 모델 시장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고, SF 공개 오디션 소식을 접하며 계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준비 과정까지는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것들이었지만, 프로의 세계는 달랐다. 개인 브랜드 쇼나 광고 촬영이 아닌, “SFW라 불리는 ; 서울 패션 위크”에서 내로라는 유명 브랜드 디자이너들은 날 매번 최종 3차 오디션에서 떨어뜨렸다. 쉽게 설 수 있는 브랜드 쇼도 많았다. 하지만, 학교 일정과 모델 스케줄을 동시에 소화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해서 다음 시즌으로 미루고, 굵직한 쇼 오디션만 시간내서 보러 다녔다. 중간고사 기간까지는 자잘한 데뷔 쇼는 미루면서 학교 생활에 집중했지만, 모델으로서의 커리어가 망가져가는 느낌에 재빨리 뱃머리를 돌렸다.


너무 빨리 돌렸고, 너무 급했던 것 같다. 급한 마음에 내 통제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 기다릴 줄은 모르고 회사와 계약을 파기했다. 다른 회사 오디션과 개인 브랜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이미 대부분의 기회는 날아간 뒤였고, 하루 밥 한 공기와 고구마 200g, 닭가슴살 300g 정도만 먹으며 운동하고 오디션을 찾아 돌아다니는 기간이 길어지며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쉬게 되었다.


모델 지망생일 때는 내가 부단히 노력하면 노력하는 것과 어느 정도는 비례하여 결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그리고 서울 패션위크는 내가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당시에 3차에서 떨어지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지금은 떨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델으로서의 얼굴이나 신체 특성이 문제가 아니라, 눈빛이 흐린 게 이유였다. 실제로 '김서룡 옴므' 오디션 최종에서는 선생님이 '이 친구 눈빛이 너무 병든 닭처럼 힘 없어 보이지 않아?'라며, 선글라스를 주셨다. 그래도 워킹에서 나오는 힘찬 느낌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모델들과는 달리 나는 안 먹어도 너무 안 먹었고, 필요 이상으로 운동도 많이 했다. 간절했던 만큼 노력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노력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너무 간절했던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이 지금 내가 얘기할 수 있는 여러 요인들 중에 가장 명확한 것이다. 오디션을 3차까지 통과하면 디자이너는 쇼의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모델을 가려낸다. 그랬기에 마지막 쇼에서 뿜어낼 에너지 만큼은 비축해두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몰랐다.


모델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연기도, 모델도 내가 좋아하는 것일 뿐,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판단한다. 하고는 싶지만, 그건 나중에 여유도 되고 조건도 되었을 때, 그때 할 거다. 지금은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나의 소중한 시간을 들여 배운 것들을 활용하며 살아가며, 삶과 ‘나’에게 진솔한 태도로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다.


결국, 인생에 대해 좀 더 빨리 배웠다면 내가 회사를 빨리 나오거나, 혹은 중간고사 이후에야 학교 생활을 접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몸을 그렇게 버리면서까지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후회는 아니다. 조금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인생에 대한 배움과 나에 대한 배움이 결국엔 어느 일에서든 기저에 깔리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보이기보다 느껴지는 능력치. 


배움이란, 머리를 채우기보다 비워내는 것이고, 마음은 채워가는 것이다. 메모로 예를 들면, 메모를 쌓아두기보다는(머리를 채우기보다는) 그것을 체화하고 삶에 녹여내는 것(마음을 따뜻하게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것과 같다. 마음이 채워지는 과정이 지혜가 쌓이고 아량이 넓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패가 없었으면 지금의 소중한 나와 삶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가려는 지금의 나도 없었다. 오히려 실패하지 않았다면, 계속 밀어붙이는 이성진만 남았을 것이고,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면 더 크게 아파해야 했을 것이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노력할 수 있었음에, 깨달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건강을 되찾고 내 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더 좋은 것 같다. 아무렴 이미 지난 일이고, 나는 내 결과를 받아들인다. 실패 맞다. 그리고 덕분에 지금 내가 훕라에 있고, 또 글도 쓸 수 있었고, 이렇게 대학교도 오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에 실패 딱지 붙이기를 싫어한다. 하지만 실패가 싫으면 성공 딱지에도 마냥 좋아해선 안된다. 실패냐 성공이냐 보다, 성장과 만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이성진’이 살아온 인생에서의 경험과 안목으로는 '성공/실패' 보다 '성장/만족'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나의 인생에서는 꾸준함이 정말 절실한 상황이다. '김재천 평전 축약본'에 나오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보다 일단 시작한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말이 무척 와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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