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사이 또 눈이 내렸다. 마당 테이블 위에 쌓인 눈을 재 보니 족히 7cm는 넘는다. 눈을 치우던 남편이 눈 내린 종묘를 보러 가자며 나갈 채비를 하란다. 갑자기? 1시가 다 돼 가는데? 눈 내린 적막한 종묘를 꼭 보고 싶었단다. "콜!" 10분 만에 집을 나섰다.
서울로 향하던 중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아, 이런, 종묘 정전이 보수 중이라 관람이 안 된다고 했다. 커다란 가림막으로 정전 건물을 가리고 있었다. 어쩌나? 그럼 눈 덮인 궁궐 산책이나 하자. 다시 "콜!" 궁에 도착하니 그 사이 눈이 다 녹아 궁궐 길이 온통 진탕이었다.진탕길을 걷고 싶진 않았기에 날 좋을 때 다시 오자 하며 서촌으로 향했다.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단호박 크로켓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집은 진즉에 없어지고 닭강정을 팔고 있었다. 도대체 이 나라 백성들은 닭 못 먹어 죽은 귀신들이 붙었나. 생기는 게 닭집이고 문 닫는 게 또 그 닭집들이다. 그 많은 닭들은 과연 다 소비가 되는 것일까. 닭집을 하는 사람들은 살림살이 괜찮을까. 또 스멀스멀 객쩍은 생각이 밀려왔다.
어.... 어디로 가지?신호등이 바뀌어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갔다. 신호등 건너편에 '서촌 맛집 거리'라고 쓴 커다란 글자가 사람들 머리 위에 떠 있다. 어? 여기가 서촌이라고? 아니야, 여긴 금천교 시장이야. 종로 청운동이 고향인 남편은 서촌을 비롯하여 북촌과 안국동, 삼청동 지리에 훤하다. 여기 잘 가던 전집이 있는데 막걸리나 한 잔 할까? 추운데. 그집이 아직 있으려고.아직 있지. 콜!
파전집 문을 여는데 무슨 공간 이동인가 싶었다. 80년대, 아니 70년대 주점 풍경이다. 해물파전을 주문하고 둘러보니 여기저기 낙서가 지저분했다. 내가 쓴 낙서도 있을 걸. 찾아봐. 언제 한 낙선데? 몰라. 했다는 건 알지. 뭘 굳이 그 낙서를 찾아? 저 낙서로 충분하구만. 누렇게 손 때 묻은 한쪽 벽엔 누군가 장자가 썼다며 시인지 문장인지를 적어놓았다. 대충 뜻을 보니 *'하얗게 센 머리가 슬프고 꽃이 진다 / 푸른 구름이 부러운데 새가 나는구나 / 사람이 능히 겸허하게 산다면 / 그 무엇이(겸허하게 사는 이에게) 해를 끼치리오 '
뭐 이런 거 같았다. 머리가 세었다고(늙었다고) 슬퍼하는데 꽃이 졌다. 어느 것이 더 슬플까. 구름을부러워하는데 새가 날고 있다. 부러운 것은 끝이 없다? 그러니 사람은 겸손하게 비우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무난하게 살다 갈 수 있다는 의미? 뜻이 맞는 거야? 몰라. 누가 알겠소. 쓴 사람이 아닌데. 장자만 알겠지. 낙서의 영감을 받아 재창작했다고 생각하시오. 남편이 ㅋㅋ하며 웃었다. 파전이 안주가 아니라 벽의 낙서가 우리의 안주가 되었다.
전집을 나오니 시내는 안개인지 황사로 인한 스모그인지 온통 뿌옇고 축축했다. 영상의 날씨가 쨍한 영하의 추위보다 이상하게 더 추웠고궁궐 앞 광장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우리의 광장은 누구나 자유로이 찾아와 광장에 어울리는 열린 마음으로 기쁘게 만나 건강한 담론으로 소통하는 곳이 아니라 편향된 혐오만 가득한 곳이 되어 버렸다.
이 현실 앞에서 보수니 진보니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 어느 쪽이든 부끄럽다. 어쩌면 더 대립하여 공동체가 분열되기를 소위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바라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공동체와 나 개인의 안위 보다 표가 더 중요하니까. 집단으로 이상한 병에 걸려 미움과 배척만 남고 부끄러움을 잊어버렸다. 그런 시대가 무엇을 도모할 수 있을까.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상식적인 생각도 리더로 뽑히면 사라져 버리는 이제도를 고쳐야 할까. 교육이 문제일까. 분단이 그 모든 싸움의 원인인가. 시대는 곧 사람이 아닌가. 시대와 제도,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육이 문제로구나. 왜 우리는 이토록 완고한가. 바깥 광장도 물음만 가득한 내 안도 시끄럽다. 광장을 지나며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이른 저녁인데 일찌감치 문 닫은 점포들과 군데군데 비어있는 점포들이 많아 거리는 어둡고 쓸쓸했다. 안개 때문인지 어둠 때문인지 집에 가고 싶어졌다. 따뜻한 차나 한 잔 할까? 아니, 어두워지니까 거리가 쓸쓸하네. 집에 가자. 이번엔 남편이 "콜" 했다. 나는 돌아갈 집이 있는데,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이 밤을 새우나. 돌아갈 집이 있어 감사하구나. 또 객쩍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파전집을 나와 체부동 골목을 돌아 이제는 잔디공원이 된 옛 미군 기지를 통과해 안국동과 인사동 길을 걸어 종로로 나온 우리는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우리 집 개가 격하게 반긴다. 반나절만인데도격하게 반겨주는 개가 있는 우리 집. 감사하다.
금천교 시장에서 찍은 사진을 고르고 그중 하나를 그려 본다. 전깃줄이 눈에 띈다. 도시의 삶은 저 엉킨 전깃줄이구나. 전류가 흐르는 저 선을 따라 빛과 에너지가 흐르고 찌릿한 위험도 흐른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밥을 먹고 돈을 벌며 얽혀 살아가는구나. 그림을 그리며 또 객쩍은 생각 한 보따리가 엉켰다.
서촌 금천교 시장, 만년필에 수채
* 낙서 원문 : 白髮悲花落/靑雲羨鳥飛/人能虛己以遊世/其孰能害之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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