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내에서 2년 7개월을 살았다. 7년째 살고 있던 한옥집은 겨울이면 실내 온도가 3도였다. 겨울이 추웠다. 그러나 봄이 시작되면 한옥집의 정취를 마음껏 누릴 수 있어서 난로를 때며 겨울을 참아냈고 그 외엔 불만이 없었다. 나는 그 한옥집을 사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나가라고 했다. 그때 오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집을 얻어야 했기에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능내역 바로 옆에 있던 집을 얻었다. 서향이긴 했지만 넓은 잔디 마당이 있었고 걸어서 3분이면 성당에 갈 수 있었다. 주변에 자전거 길과 다산 생태공원, 풍성한 연꽃 서식지가 있어서 봄부터 겨울까지 다 좋았다. 자전거길로, 성당 가는 길의 소나무 숲길로, 다산 생태공원으로 설렁설렁 산책하기에 그만이었다. 집에서 성당을 거쳐 다산 공원까지 한 바퀴 걷다 보면 새삼 그런 동네에 산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여겼다.
2008년에 문을 닫은 능내역에선 토요일마다 버스킹이 열렸다. 다산 생태공원과 능내역으로 나들이 나온 서울 사람들을 구경하며 나는 매일 주변을 산책하고 강물의 윤슬을 바라보다가 성당 미사에 갔다. 그런데 살고 있는 집을 사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며 집을 살 궁리를 하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집안 사정이 생겨서 시부모가 살아야 한다고 했다. 관광지이긴 했지만 평일엔 조용했고 무엇보다 주변 환경이 좋아서 나는 능내에서 계속 살고 싶었는데 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한옥집을 떠날 때와 다르게 속이 상한 나는 집을 보러 다니다가 집값보다 싼 땅을 발견했고 덜컥 사서 집을 지었다. 그리고 능내를 떠났다.
이사를 와서도 봄가을이면 나는 능내에 갔다. 커피를 텀블러에 담고 샌드위치나 유부초밥을 싸들고 미사에 참례한 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산책하다가 나만의 나무 그늘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날이 좋거나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엔 더욱 능내에 가고 싶었다. 책을 읽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즐기는 그 시간들이 참으로 귀하고 충만했다. 눈 돌리는 어디나 강물이 보였고 향긋한 풀냄새가 가득한 능내와 그 주변을 나는 참 좋아했다. 사계절 좋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올 봄에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비가 내렸다. 오랜만에 팔당 옛길을 지나며 능내를 보고 싶었다. 능내역을 막 지나려는데 차 뒤 유리창으로 책방이라고 쓴 간판이 언뜻 보였다. 친구들과 나는 동시다발로 "저기 책방이 있어."하고 소리를 질렀다. 급히 차를 돌려세우고 내리니 "능내 책방"이 있었다. 허름한 옛집이 있던 자리에 2층 건물이 섰고 그 1층에 둥지를 튼 책방이었다. 책방 앞에는 "능내책방"이라고 쓴 작은 나무 입간판과 칠판이 놓였고 칠판엔 박남준 시인의 "봄날은 갔네"라는 시가 분필로 쓰여 있었다. 마침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시를 보고 그만 깔깔거렸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사는 /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이하 생략)"
이런 시를 적어놓을 줄 안다면 이 책방은 괜찮네, 하며 책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후한 점수를 주며 헤프게 마음을 주고 말았다.
동네 작은 서점에 대한 편견이라도 있었나 보다. 책방은 내 편견과 다르게 알찬 내용을 하고 있었다. 서가에 놓인 책은 바로 그 책방의 정체가 아닌가. 독서를 좀 한다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책들이 꽤 많았다. 예전에 열심히 읽었던 책과 내가 아끼는 책도 보였고 요즘 읽는 책까지 꽂혀있어서 책방은 내 집의 책장 앞에 서 있는 기분을 들게 했다. 나는 밀란 쿤데라의 '불멸'과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샀다. 이후에 또 한 번 들러 '언어의 무게'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더 샀다. 알고 보니 책방주인은 일본어 번역가였고 어느 날 능내에 왔다가 동네 분위기가 맘에 들어 덜컥 책방을 열었다고 했다. 세는 나와요? 하고 나는 물었고 책방 주인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 커피 한 잔 드리겠다며 커피를 내어 주는데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커피 홀더에 "책 좀 사라. 굶기 싫다"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에 또 오겠다며 돌아서 나오는데 출입문엔 또 이런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 "덮어놓고 사다 보면 언젠간 읽는다" 나는 또 웃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가능한 책을 사지 않고 있다. ( 물론 브런치 작가님들의 책은 주저하지 않고 산다.) 집이 협소해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고 가까운 곳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하면 되니까. 동네 도서관에 원하는 책이 없으면 상호대차라는 걸 이용하여 인근의 다른 도서관까지 활용할 수 있어서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되었다. 도서관에 없으면 밀리의 서재를 이용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 그때 책을 산다. 책 구매는 주로 인터넷을 이용한다. 예전처럼 서점에 직접 나갈 일이 없다. 그런데 이런 나의 책구매에 변수가 생길 것 같다. 예전처럼 주머니에 돈 있으면 무조건 책을 사진 않더라도 나는 종종 능내책방에 들를 것 같다. 책방 주인이 굶으면 안 되고 또 내가 좋아했던 능내에 귀염둥이처럼 둥지를 튼 책방이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궁금해진다. 오늘은 매상 좀 올렸으려나.....
능내엔 오래된 폐역 앞에 연두색 간판의 작은 책방이 하나 있다. 책방지기는 굶기 싫다고 책 좀 사라고 한다. 능내에 간다면 카페에만 가지 마시고 능내 책방에도 들러 주시라. 책방지기가 밥을 굶지 않도록 꼭 책 한 권은 사시길 부탁드린다. 책 한 권을 사면 적어도 두 명은 배부를 수 있다. 책방지기와 책을 읽는 본인이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니 서툴러서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능내에 있는 능내 책방 - 책방은 작지만 책의 세상은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