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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un 04. 2024

진부령을 넘었다

어반 스케치 그리고 쓰다


미시령으로 가려다 차를 돌려 진부령을 넘었다. 진부령 옛 고갯길을 구불구불 넘어오도록 오가는 차가 없다. 인제에서 새로 뚫린 편하고 좋은 길 덕분이다. 다들 그리로 다닌다. 길이 바뀌자 진부령 휴게소도 최저가 가격표를 내걸었던 황금주유소도 문을 닫았다. 생활이 멈춘 공간은 쓰레기로 남아 더는 아무도 유혹할 수 없는 낡은 간판을 단 채 쓰레기 더미와 함께 버려지고 잊혔다. 존재든 장소든 사물이든 버려지고 잊힌 것은 쓸쓸하다. 도로에 놓여있던 어떤 주검처럼 가엾고 무력하다. 


진부령에 바람이 불었다. 몸이 휘청일 정도였다. 아카시아가 산을 덮은 걸까. 산이 온통 하얗게 보였다. 긴 머리카락을 한 여자가 심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뭇잎들이 바람 때문에 모두 뒤집어져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 나무들은 한 방향으로 심하게 까불리며 잎의 하얀 뒷면을 내놓고 일제히 고개를 돌린 채 바람을 맞았다.


고개 아래 마을에 도착하니 바람이 조금 순해졌다. 한 방향으로 향했던 나무들은 다시 머리를 들고 있었지만 바다는 미친 듯 출렁거렸. 보는 이의 속이 다 울렁거렸다. 일말의 기대마저도 없이 끝나버린 연애처럼 테이블마다 흰 비닐을 덮어놓은 식당엔 밥을 먹는 손님이 없었다. 달고 짭짤한 생선조림을 먹고 해파랑길에 오르니 해안가 어디쯤 피어있어야 할 해당화가 피었고 흰 화강암의 인어공주가 화진포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어 공주도 해당화도 제 고향에서 떠나와 바람 심한 산꼭대기에 놓여 있는 모습은 생경했다.


바람 탓일까, 아니면 아카시아향 때문이었을까. 근본도 없이 쓸쓸해져서 아카시아 잎을 떼며 점을 쳤다. 인어공주가 사람이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목소리는 왜 홀랑 내주어서 왕자에게 말도 못 하고, 바닷속 자매들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물방울이 되어 떠돌다가 이 산속에서 돌로 묶인 것일까. 사랑은 때로 물방울처럼 허무한 것이다. 자신을 다 내어 주면 '내'가 없어져서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나'를 속절없이 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함께 커 가며 꿋꿋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함께 성장할 수 없는 사랑은 소모적이다. '내'가 없는데 사랑은 있을까. 혹자는 그런 사랑도 고귀한 것이라고 하겠지... 그렇기도 하겠지... 생각에 잠겨 걷는데 꽃이 달다며 아카시아꽃을 입에 넣어주었다. 꽃은 달지 않았다. 쓰고 비렸다. 보기에 예쁘고 향이 좋다고 입에는 좋은 것은 아니다. 아니면 마음 입맛이 쓴 것일까. 눈으로 볼 것과 향으로 즐길 것, 입으로 음미할 것은 조금씩 다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원하고 채우려 하는 것일까. 원하는 마음보다 상심하는 것이 더 어리석다. 아카시아는 바람에 실려오는 향기  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저녁은 속초에서 먹었다. 유명한 음식점과 같은 음식이었는데 맛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바닷가에 앉아 돌이 된 인어공주처럼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은 종일 맹렬하여 해가 지는 수평선은 곡선이었다. 하늘도 바다도 하나인 듯 짙은 보랏빛이었는데, 언젠가 지리산 기슭에서 보았던 오동나무 두 그루가 보라색 꽃을 잔뜩 매달고 바닷가에 서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 같은 생경한 풍경. 이 짧은 여행의 화제는 생경함인가 보다. 하루의 여행도, 짧은 우리 생의 여정도, 언젠간 믿거나 말거나 남은 이들의 설화가 될 것이다. 보랏빛 풍경 속 오동나무와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동행자들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잠이 들었다. 이상한 기운에 눈을 뜨니 비가 세차게 내려 차선이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가 강해지는가 싶더니 홍천쯤에서 성글어진 비가 용문쯤에선 내리지 않았다. 도착해 씻고 자리에 누우니 황폐해진 옛 진부령길과 바람에 나뒹굴던 쓰레기들이 자꾸 생각났다. 



진부령 정상 박물관 앞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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