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세계의 중심에서 과학자나 군인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그것으로 인류와 외계 생명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보다는 변두리에 있는 평범한 인물이 모순적 상황과 세계와의 갈등에 처하는, 그러나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사랑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을 들게 했다.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가슴 벅차게 하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쓰고 싶은 나'를 새롭게 발견한다."
(책과 우연들, 김초엽 )
<질문> 당신은 언제 글을 쓰고 싶나요? 당신에게 글쓰기란?
*"어느 날 뚜렷한 목적도 없이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카잔차키스' 중에서>
나의 오랜 글쓰기는 일기였다. 간간이 SNS에 글을 올리기도 하고 나 홀로 블로그에 책과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내게 글쓰기는 일기였다. 그러다 브런치를 시작했고 이제 4년 차가 되었다. 해마다 브런치북 프로젝트 공지를 볼 때마다 울렁거리는 나에게 브런치의 의미는 누군가 읽어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 매일 한 편씩 글을 올렸다. 미리 써 둔 글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2년이 넘어가자 글을 올리지 못할 때가 많았다. 숙제를 미뤄둔 기분이었고 할 일을 안 하고 농땡이를 치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 마감이 있어 독촉을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글을 써야 한다며 중압감을 가졌다. 수익이 나는 일도 아닌데 글을 쓰지 못하면 괴로웠다. 나는 왜 쓰고 싶어 하는 것일까. 전문 작가도 아니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며 글을 쓴다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왜?
이미지 출처-핀터레스트
김영민 교수는 *"사람들이 글을 써 남기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삶을 견디기 위해 영원을 희구하는 일"이라며 "훗날 누군가 자기 글을 읽어주기를 내심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를 언급하며 "이윤주 작가는 글을 써야 할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엄습하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쓸 필요가 있다고. 쓰기 시작하면 불안으로 달구어졌던 편도체는 식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쓰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진정될 수 있다."며 "시간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은 글을 쓴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대로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인지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인지 전전두엽의 활성화를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나를 진정하기 위해 쓴다',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구독자수나 라이킷에 크게 마음 쓰지 않지만 내 글을 읽어주길 바라며 글을 쓰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만일 그런 바람 없이 혼자 좋아 쓰는 거라면 굳이 공개된 플랫폼에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이렇게 저 좋아서 했던 글쓰기가 읽어주는 사람들을 의식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일기와는 다른 동기부여를 만들며 글쓰기에 새로운 의미가 생긴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조명을 켜는 스위치를 누르는 것과 같다. 스위치를 누름으로써 어두운 공간에 빛을 밝히는 것처럼 머릿속을 떠도는 무질서한 생각과 감정들이 언어로 드러나는 것이다. 머릿속 빛은 꺼지기도 하고 켜지기도 하면서 숨어있던 언어들이 단어로 나타나고 단어는 문장이 되면서 한 편의 의미가 된다.
글쓰기는 세계에 대해 민감해지도록 한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한다. 보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 수 있지만 그 무의미함을 나는 견디지 못한다. 적은 수의 구독자를 가진 가난한 무명의 브런치 작가일 뿐이지만 글을 쓰다 보니 바람에 굴러가는 메마른 낙엽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애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며 잠을 자기도 했고 배고프면 조금 갉아먹도록 자신을 내주었을 낙엽. 초록 엽록소를 내어 주느라 옅어지고 얇아진 시간이며 바람이 흔드는 것을 견뎌냈을 낙엽. 때가 되어 나무를 위한 양분이 되는 낙엽을 지나칠 수 없는 것이 글쓰기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눈이 마주친 까마귀에게도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글쓰기는 다른 존재와 시간의 흐름, 변화와 소멸을 관찰하게 한다.
관찰엔 민감함이 필요한데 이것은 때때로 괴롭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 내밀한 세계를 느낀다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 안에는 숨겨놓은 '내'가 있고 '나'는 민낯 그대로의 '나'이다. 민낯을 대한다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내고 눈길 가는 것에 무심해질 수 없는 일은 불편하지만 충만함을 선물로 받는 일이기도 하다. 이 충만함에 중독되어 자꾸 찾게 되는 것, 내밀하게 속삭이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내겐 글쓰기다. 이를 통해 무릎이 꺾여 넘어지곤 하는 어떤 경계들 , 자기 비하, 불안, 열등감, 두려움을 넘어서게 한다. 민감함과 관찰은 글로 이끄는 통로이다. 민감함이 없다면 글쓰기로 이끄는 무엇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나의 정서를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이끌어 가지 못할 것이다.
사물의 모습과 주변의 풍경, 일상의 감정을 생각으로 간직하는 것과 말로 내뱉는 것, 글로 옮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생각으로 간직할 때보다 말로 표현할 때가, 말로 표현할 때보다 글로 옮길 때의 차이는 확연하다. 일어난 사실을 직면하며 어지럽던 감정과 사유가 활자화되면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무엇이 가짜인지, 본질은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좌절은 기본 옵션이다. 주제 파악을 못한 과욕이 생기기도 하고 재능에 대한 의심으로 의기소침해진다. 신변잡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넋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안 되는 글을 쓰고 발표하는 것이 과욕이 아닌가 하는 생각. 반짝거리는 촌철살인의 문장이 내겐 없구나 하는 초라함은 매일 찾아오고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도 일상 다반사다. 배우 차태현씨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당신의 연기는 생활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배역은 특별한 점이 없다." 하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이랬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나이고 나는 그런 연기를 잘한다. 이것이 배우 차태현의 특징이다."라고. 나의 글쓰기가 삶의 넋두리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 때문에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그냥 꾸준히 써라, 글을 쓰니까 작가다, 작가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꾸준함이 글을 만든다.(스테르담 작가)"라는 조언과 격려를 붙잡는 것도 글쓰기에 필요한 힘이다.
이제 결론을 좀 내 보자.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글을 쓰면 인간이 좀 나아질까? 그렇다. 글을 쓰면 인간이 조금은 나아진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글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숨어있던 연민한 마음을 키우고 삶의 허무를 넘어서게 한다. 어제의 실패와 실망을 넘어서고 오늘의 현실과 '나'를 지나가며 나는 글을 쓴다. 이 움직임에 끌려 스위치를 켜고 말들을 다듬어 발행을 누르면 나는 발행 전과 달라진 '나', 곧 쓰는 사람이 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나의 희노애락을 생생히 마주한다. 글을 쓰지 않는 창작 활동이 없다면 나는 나와 세계의 부조리함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 대신 내가 슬픔을 본다. 쓰기 전에 슬픔은 나 자신이었지만 쓰고 난 후에는 내게서 분리된다. 손으로 공을 굴리듯, 그것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참조>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사회평론
*[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비채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윤주, 위즈덤 하우스
*영화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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