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한다.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는 건 더 좋아한다. 어딘가 아프거나 돈이 떨어지면 책을 샀다. 돈이 없으면 신용카드로 빚을 지면서샀다. 어느 날은 덮어놓고 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사지 말 걸 " 하는 후회는 별로 한 적이 없다. 현실의 쓸쓸함과 늘 돈이 부족한 두려움 때문에 서글프고 비참해지는 마음을 그렇게 상쇄했다. 남편은 성품이 좋은 사람이어서 생활비가 없는데도 책을 사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밥벌이 할 때는 돈을 열심히 버느라 자주 아팠다. 몸만 아프면 다행인데 때때로 마음은 더 아팠다. 이러한 아픔에 대한 처방을나는알고 있었다.그것은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이었다.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으며 내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이 처방은아픔을 잊게 해 주는것뿐만 아니라 치유 효과도있었다.나는 이것을 독서 테라피라 불렀다.하지만 현실과 처방전은 평행선이었다.
처방대로하기 위해선세상에서 비껴 난내시간이 필요했다. 언감생심,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퇴근해야 하는생활인에겐어림없는 소리다. 사회생활과 집안일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즐길 시간은 당연히 부족했다.그런 것이 생활이고 곧 삶이니 어쩌겠는가. 인생엔 때맞춰 감당해야 할 일이 따로 있고 때 가 되지않았음을 알고 견뎌내는 것 또한 삶인 것을. 원하는 다른 것들과 함께방해받지않는나만의시간을 찾아 책 읽는즐거움 따위는 이다음으로,나중으로 유예되었다.
드디어 때가 되어 밥벌이를 그만두었고 겨울이었다. 전날 읽던 책을 이어 읽고 있었는데 주변이 차분해졌다. 문득 머리를 드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고 처음 보는 풍경인 양 좋으면서도 생경했다.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책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가 오는 날도 그랬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왜 더 출근하기 싫었는지... 출근해야 하는 시간에 눈은 내리고 나는 책을 읽고 있다...뭉클했다. 쌓였던 상처와 아픔들이 0으로 리셋되며 눈과 함께 녹아 사라졌다.지금도 비가 내리거나 눈이라도 오면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뭉클해진다.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특별히 없다. 독서는 다른 독서를 불러온다. 한 권을 읽다 보면 다음에 읽을 책은 저절로 생긴다. 취향 또한 다양해진다. 세상에 읽을 책은 많고 많다. 한 권을 집중적으로 읽을 때도 있지만 보통 두세 권을 함께 읽는다. 읽으면서 그때그때 메모를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다 읽고 나서 정리할 때도 있다. 좋은 문장을 옮겨 적고 줄거리를 요약한다. 인물 가계도를 표로 그려놓기도 하고 내 생각을 첨가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읽고 나서 기록해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 읽은 것에 대한 기록은 읽기의 한 부분이며 완성이다. 또한 쓰기의 에너지이고 원천이며 영감의 통로이다. 독서가 다른 독서를 불러오듯 읽기에 대한 기록은쓰기를 불러온다.읽고 쓰는 일에서어느 것 하나가 더앞서지는않는다. 많은작가들이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끊임없이 읽고 필사한다.
읽을 땐 주로 소파나 침대에서 무릎을 세운 채 반쯤 누워 읽는다. 잠자기 전 침대에서 읽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데 집안이 조용해지는 시간이라 집중이 잘 되고졸릴 때까지 읽다가 언제든 바로 잘 수도 있다.오히려 책상에서 읽는 것이 가장 불편하다.
대충끼니를 때우며독서에 집중할 때가 있는데 바로 휴가와 연휴 때다. 올 추석 연휴처럼외부활동도없고 가족들 삼시 세끼 밥을 챙겨야 하는 일에서도 놓여난 것이 딱 책 읽기 좋은 때였다. 앉아서 읽고 소파에 기대서 읽고 누워 읽고 읽다가 자고 자다가 읽었다. 그야말로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다. 이런 날의 독서는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긴 시간 유지되면서 나를 고양시키고 충만하게 한다. 에릭 호퍼는 "인간은 필요에 쫓겨하는 활동보다 놀면서 하는 활동을 통해 완성(인간의 조건)"된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 읽기는 자발적이고 창조적이며 즐거운 최고의 놀이이다.
그런데 책 읽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몸이 아프다.눈은 피로하고 발이 붓고 어깨와 허리가 뻐근하다. 특히넓적다리와 골반이 아픈데 오랫동안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어나 중간에 스트레칭을 한다든가 하며 몸을 풀고 다른자세를 취해도 다시 아프다. 혹여책의 내용이 불편하거나 연민을 일으켜 마음까지 아프면 이중으로 괴롭다.
퇴계 이황 선생은 69 세에 돌아가실 때까지평생 책을 읽었다. 고봉과 주고받은 서신을 모아놓은 "퇴계와 고봉,편지를 쓰다"(소나무)를 보면 선생은 날마다 아프다. 등이 아프고 무릎과 다리가 아프고 골반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눈이 아프다. 매양 어디 아프다는 내용이 편지마다 나온다. 그것은 선생보다 30년젊었던고봉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그도 늘 아프다고썼다. 이번에 어디가 아파서 편지가 늦었다느니, 얼마 동안 아파 누워있느라 무엇을 못했다느니아프지만 겨우 일어나 무엇을 읽고 그 뜻을 궁구 했으며 그 생각을 정리해 이제야 인편에 편지를 보낸다느니하는 내용이 태반이다. 그러면서 무엇을읽었는데 미련해 뜻이 미치지 않으니 가르침을 주시라거나읽은 것에 대한 생각을 써서부치니의견을 달라며 아프지 마시라했다. 스스로에게 엄격했을 선비들이라 누워 읽거나 쓰진 않았을 테니 오죽했을까.
휴가와 긴 연휴 때 책을 읽느라 여기저기가 아프면서 그들이 생각나 웃었다. 아! 그래서 그 양반들이 노상 무슨 책을 읽었는데 어디가 아프다고 했구나! 감히 퇴계선생과 고봉에 비할까만 나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그들을 이해했다. 젊었을 땐 젊은 세상을 사느라 책 읽는 것이 어려웠고 읽었어도 아팠던 기억이 별로 없다. 몸이 아플 정도로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픔보다 분노가 더 많았고 다른 놀거리에 빠져서 그 아픔과 분노를 또 흘려보내곤 했다. 나이 들어 책을 읽으려니 그만 몸이 아픈 일이 되었다. 필요나 지적 허영심이 아닌 책 읽는 즐거움을 비로소 알았는데 몸이 아프다. 책 읽기는 눈으로가 아닌 몸으로 읽는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그 앎이 단순하여 생생하고새롭다. 그래서 그랬나. 80이 가까운 김훈 선생은 밤엔 책을 읽지 않는다(허송세월)고 썼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렸고 또 다른 책은 없다길래 신청해 놓고 왔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책을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책을 읽을 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자랑질을 할 수 있다는것이 감사하다. 책 읽기가 없었다면 글쓰기도 없었을 터, 이 모든 것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