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생은 왜 떠나야 했을까?
<금호신화> 중 '용궁부연록'을 읽고
* 한생은 왜 떠나야 했을까?
금호신화 중 가장 유쾌하고 발랄한 작품이 '용궁부연록'이다.
어느날 고려 한생이라는 사람이 꿈에서 용궁의 연회에 초대를 받는다. 용왕은 글재주가 조정에까지 알려진 한생을 초대하여 새로 지은 누각의 상량문을 지어달라고 청한다. 잔치에는 과개사(게), 현 선생(거북이)등이 춤으로 흥겨움을 더한다. 잔치가 끝난 후 한생은 용왕의 호의로 용궁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된다. 헤어질 때는 용왕으로부터 구슬과 비단을 받게 된다. 꿈에서 깬 한생은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한생이 다녀온 이 용궁은 어떤 곳일까?
한생은 용궁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용궁을 다녀온 한생은 왜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떠난 것일까?
오비디우스는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다고 했다.
성리학에서는 ‘무극이 태극’이라는 말로 태초를 설명한다.
‘카오스’나 ‘무극’은 원인을 따라 소급되어 올라간 ‘최초의 원인’에 가장 가까운 자리이다.
이 원인의 자리에서 질서가, 음양의 조화가 나온다.
달리 말하면 이 자리는 결과의 자리가 아닌 원인과 생성의 자리인 것이다.
한생이 돌아본 용궁은 그런 원인의 장소이다.
번개가 나오고 바람이 나오고 비를 만들어 내는 자연의 변이가 생성되는 장소이다.
생성의 장소는 곽개사(게)도 팔풍 무를 추고 현 선생(거북이)은 구공무를 추는 곳이다.
축제의 자리, 잔치의 자리인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의 의식은 결과의 자리에 서 있다.
탄생 이후, 행위 이후, 감정 발생 이후의 자리이다.
쉽사리 피해자, 희생자로 서 있다.
그래서 삶의 축제를 즐길 줄 모른다.
그러한 평범한 의식을 가진 한생이 용궁이라는 특별한 만남을 계기로 변이를 겪게 된다.
더 이상 결과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는 획기적인 변이가 일어나게 된다.
희생자, 피해자 자리가 아닌 능동자, 생성자의 자리로 이동한다.
결과의 자리에서 벗어나 원인의 자리, 생성의 자리로 이동한 사람은 삶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이러한 변이의 과정을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이것을 ‘체험’과 구별하여 ‘경험’이라 칭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고 ‘체험’은 그저 자기 자신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경험’은 타자와 내가 만나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고 변형되는 것이라면
‘체험’은 내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여 타자가 내 안에서 익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인의 자리를 보고 온 자, 생성의 자리를 보고 온 자, 한생은 바로 '경험'한 자이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매일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러나 경험이 아닌 체험에 머무른다면,
새로운 세상이 아닌 기존의 세상에 머무르게 된다.
새로운 삶을 바란다면,
이제 삶을 체험이 아닌 경험을 해보자, 한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