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처음으로 접하는 것은 20대 초반, 아는 스님 한 분이 준 책을 통해서였다. 김용옥의 책으로 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안나는데 대략 '이것이 노자철학이다' 정도 였던 것 같다. 이 책은 충분히 노자에 대해서 질리게 만들었다. 노자 이야기는 내 인내심이 바닥이 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고, 노자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해석에 대한 비판만 줄기차게 나왔다. 아직 여물지 못한 나이에 접한 노자는 그렇게 참혹하게 내 인생 밖으로 밀려났다. 그 후 김용옥은 TV에서 노자 강연으로 대박을 쳤으나, 책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탓으로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는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자로서, 책에 대한 비판이기보다는 나의 무능에 대한 고백이다.
그 후 한참의 시간이 흘러 다시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도덕경으로 한문을 공부하라는 선배의 조언으로 다시 도덕경을 손에 들었다. 학습을 위한 도덕경이어서 그 철학적 함의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그저 문자에 불과했다. 책에서 본 모나리자를 루브르에서 만났을 때 전혀 감흥을 못느꼈던 것처럼, 가끔 만나는 도덕경을 풀이한 책들은 그저 덕담 정도로만 여겨져서 마음을 전혀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다 만난 신정근의 '노자의 인생강의'는 저 멀리 제쳐두었던 노자를 다시 삶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신정근 선생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공자, 맹자, 노자는 시대의 아픔을 뚫고 나오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도 노자가 살았던 시대와 그런 사상이 대두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요구등을 어렵지 않은 언어로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 앉혀놓고 이야기 하듯 풀어낸다.
흥미가 생긴 김에 도덕경에 관한 책들을 탐색했다. 그러다 만난 김형효의 '사유하는 도덕경'은 그야말로 음미할 수 밖에 없는 사유로서 '도덕경'을 만나게 해주었다. 김형효 선생님은 인류에게 출현한 사유를 두가지 방식으로 고찰한다. 상관적 사유 방식과 인과적 사유방식이 그것이다. 노자, 석가, 하이데거, 헤라클레이토스 등을 상관적 사유방식이자 순환론적 사유 방식으로 보고, 도덕경의 '무'를 유와 체용으로 짜여져 있는 혼성과 교직으로 음미하고 있다. 그는 '도덕경'을 "무의 허공을 배경으로 하는 유물의 상관적 사유방식에 따른 세상보기"라고 정리한다. 당분간은 이 책으로 도덕경을 읽을 것 같다.
오랫동안 "무위하라 무위하라" 라는 구호에 대해서 '~을 무위하라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도덕경을 읽다보니 '목적어'를 찾아야 이해를 하는 나의 사유 패턴과 이것 때문에 무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직은 혼자의 힘으로 도덕경을 읽어내기에는 부족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덕경이 나를 명령하는 형이상학적 보편론으로서 저 위에 혹은 저 밖에 멀리 떨어져 있는 덕담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매순간 실행의 담론으로 내 앞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