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토론을 하다 보면, 아무리 해도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간극은 애초에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서로 서 있는 입지와 고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아무리 논쟁을 벌여 서로에게 다가가려 해도 다가갈 대상 논지가 없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경우도 그렇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를 주인과 노예 간의 투쟁이 국가와 사회의 투쟁으로, 그것이 결국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의 투쟁으로 발전하였다고 본다.
결국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투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크레온이 ‘국가의 법’을 표상하고 있다면, 안티고네는 ‘신의 법’을 표상하고 있다.
헤겔이 연장선상에서 같은 문제로 치환한 이 대결은 실은 같은 논지로 치환될 수 없는 고도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같은 논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설득과 토론으로 정반합의 과정을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 있는 입지가 다르면 상대는 나의 反이 되지 않기에 合에 이를 길이 사라져 버린다.
안티고네는 분명히 자신이 ‘신의 법’의 입지에 서 있다고 밝히고 있다.
친족을 매장하는 것은 인간이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신의 법’이니 이는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의 법'이 '인간의 법' 위에 있다는 것이 그녀의 논지다. 따라서 크레온이 국가 통치 법을 따라 ‘인간의 법’으로 ‘신의 법’을 저지하고 있어 큰 대가를 치를 거라고 말한다.
안티고네의 反은 ‘인간의 법’인 것이다.
반면, 크레온은 이 상황을 '공적인 법'과 '사적인 법'의 대립으로 보고 있다.
자신의 폴리스를 배신하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 범법자를 국가법에 의해 처벌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고 사적인 법을 적용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크레온의 입장에서 안티고네는 공적 영역에 사적 논리를 들이대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크레온의 反은 ‘사적인 법’이다.
이 둘은 서로 서 있는 입지와 프레임이 확연히 달라 타자에게는 모두 설득적이다.
그러나 서로에게는 결코 설득될 수 없는 고도 차이가 존재한다.
어찌해야 할까?
이 둘은 영원히 합에 이르지 못하고 서로 다른 지반을 걸어야 하는 가?
가장 모범적인 방법은 서로가 서 있는 입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합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부정하지는 않는 것.
그러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아마도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토론의 장을 항시적으로 열어놓는 방법일 것이다.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논지에 거리를 확보하여 천천히 숙고와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 적어도 타자의 입지에 대한 이해는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마저도 긴급한 상황에서는 그 실효성에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에게 많은 인문적 자료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에게는 이러한 모든 과정이 부족하다.
극단으로 치닫는 크레온을 코러스가 말려보지만, 자신의 논지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모른다.
안티고네도 결국은 자신의 논지를 목숨과 맞바꾸게 된다.
이렇듯 상이한 입지의 차이의 양극단은 이해 혹은 배척이다.
아마도 우리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상이한 입장과 고도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에 맞추어 합의를 이끌어내고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이나 기술의 발전 그리고 인식의 전환이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