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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살린 Aug 01. 2020

8. 버릴 게 없다

슬기로운 냉파 생활

냉장고 파먹기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은 녀석들

그래도 아직 냉장고엔 식재료가 가득하다. 특히 냉동실엔


생각해보면 그동안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냉장고에서 완성된 음식이나 과일, 계란만 꺼내 먹었다.

백수가 된 지금, 핑계가 사라졌다.

더 이상 수동적 냉장러가 아니라 능동적 냉장러가 되어야 한다.


뭐부터 할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게 은행과 밤과 곶감이었다.

물건에는 이야기가 스며있다.

작년 가을 시골에서 가족과 함께 동네에서 가장 알이 굵은 은행을 털었고

어머니와 둘이 사람의 발길이 멈춘 곳 너머로 들어가 밤을 주었다.


그 추억들이 냉동실에서 몸을 꽁꽁 얼린 채  숨 죽이고 있었다.

돌솥을 꺼냈다.

슬기로운 백수 생활을 준비하면서, 가전제품 사용을 줄이고자 돌솥을 하나 샀더랬다.

이제 제법 맛있는 밥을 지을 줄 알고 누룽지도 맛있게 여낸다.

돌솥에 하얀 쌀과 잡곡 그리고 은행, 밤 그리고 곶감을 앉혔다.

그 날 이후 나만의 영양밥이 탄생했다.


또 다른 골치 덩어리, 알 수 없는 풀들이 냉동되어 있다는 것,

자세히 보니 냉이도 있고, 취나물로 보이는 삶은 나물도 있고, 또 알 수 없는 풀들도 있다.

냉이는 된장국을 끓이면 되고,

기타 나물들은 그냥 무쳐 먹기엔 해동 식품이라  걱정이 되고...

 아 ~~~~ 곤드레밥

얼마 전 친구들과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던 게 생각났다.

삶은 나물들 역시 돌솥밥 재료로 들어갔다.

인터넷에 천지로 깔린 비빔 간장 레시피 중에 적당한 것으로 골라 만들어 보았다.

대박 ~~~~ 이렇게 나만의 나물밥이 탄생했다.


또또 다른 골치 덩어리, 각종 떡과 약밥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포장 상태도 양호하고, 내 기억엔 1년 미만인 것들이어서 살아남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 녀석들 중 한두 개를 골라 꺼내 놓는다.

오후 햇볕이 세력을 잃을 무렵,

커피 한잔 들고  말랑말랑 쫀득쫀득 해진 녀석들을 한 입 가득 영접한다.

하루 중 가장 포근한 시간이다.


골칫덩어리 냉장고 음식 재료들은

이제 찬란히 변용되어 매일의 파티를 준비한다.

파티의 쥔장은 나 몽몽이다.

그래 그래!!!

너희 잘못이 아니다. 어머니 탓도 아니다.

그동안의 나의 무능을 인정한다.



냉장고는 이제 숨 쉴 공간도 찾아가고

재료들은 그 쓰임을 다하고 있다.

슬기로운 나의 냉파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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