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파먹기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은 녀석들
그래도 아직 냉장고엔 식재료가 가득하다. 특히 냉동실엔
생각해보면 그동안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냉장고에서 완성된 음식이나 과일, 계란만 꺼내 먹었다.
백수가 된 지금, 핑계가 사라졌다.
더 이상 수동적 냉장러가 아니라 능동적 냉장러가 되어야 한다.
뭐부터 할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게 은행과 밤과 곶감이었다.
물건에는 이야기가 스며있다.
작년 가을 시골에서 가족과 함께 동네에서 가장 알이 굵은 은행을 털었고
어머니와 둘이 사람의 발길이 멈춘 곳 너머로 들어가 밤을 주었다.
그 추억들이 냉동실에서 몸을 꽁꽁 얼린 채 숨 죽이고 있었다.
돌솥을 꺼냈다.
슬기로운 백수 생활을 준비하면서, 가전제품 사용을 줄이고자 돌솥을 하나 샀더랬다.
이제 제법 맛있는 밥을 지을 줄 알고 누룽지도 맛있게 끓여낸다.
돌솥에 하얀 쌀과 잡곡 그리고 은행, 밤 그리고 곶감을 앉혔다.
그 날 이후 나만의 영양밥이 탄생했다.
또 다른 골치 덩어리, 알 수 없는 풀들이 냉동되어 있다는 것,
자세히 보니 냉이도 있고, 취나물로 보이는 삶은 나물도 있고, 또 알 수 없는 풀들도 있다.
냉이는 된장국을 끓이면 되고,
기타 나물들은 그냥 무쳐 먹기엔 해동 식품이라 걱정이 되고...
아 ~~~~ 곤드레밥
얼마 전 친구들과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던 게 생각났다.
삶은 나물들 역시 돌솥밥 재료로 들어갔다.
인터넷에 천지로 깔린 비빔 간장 레시피 중에 적당한 것으로 골라 만들어 보았다.
대박 ~~~~ 이렇게 나만의 나물밥이 탄생했다.
또또 다른 골치 덩어리, 각종 떡과 약밥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포장 상태도 양호하고, 내 기억엔 1년 미만인 것들이어서 살아남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 녀석들 중 한두 개를 골라 꺼내 놓는다.
오후 햇볕이 세력을 잃을 무렵,
커피 한잔 들고 말랑말랑 쫀득쫀득 해진 녀석들을 한 입 가득 영접한다.
하루 중 가장 포근한 시간이다.
골칫덩어리 냉장고 음식 재료들은
이제 찬란히 변용되어 매일의 파티를 준비한다.
파티의 쥔장은 나 몽몽이다.
그래 그래!!!
너희 잘못이 아니다. 어머니 탓도 아니다.
그동안의 나의 무능을 인정한다.
냉장고는 이제 숨 쉴 공간도 찾아가고
재료들은 그 쓰임을 다하고 있다.
슬기로운 나의 냉파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