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차 예비학부 3화, 다름을 이해하기

러시아어와 사람들, 그 속에서 배운 것들

by JNP

여러모로 러시아에서의 생활은 다름이라는 가치에 대해 일깨워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저 막연히 다르다기보다 실제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러시아어와 러시아인들의 다름에 대해 일부라도 소개하고자 한다.


러시아어로 질문하는 것조차 우리 기준에 평범하지 않다. 우리에게 제일 친숙한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어순이 비슷한 일본어랑 비교해서도 러시아어는 아주 다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의문문의 강세가 마지막에 있는 우리가 아는 언어들과 달리 강세가 묻고자 하는 단어에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 "너 학교에 다녀왔니?"를 묻는다면 마지막인 "니?" 부분에서 어조를 올려 질문을 하겠지만 러시아어로 말하면 같은 문장을 어조만 바꿔서 세 가지 의미로 물어볼 수 있다.


1. " 학교에 다녀왔니?"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갔는지 확인)

2. "너 학교에 다녀왔니?" (간 곳이 학교인지 확인)

3. "너 학교에 다녀왔니?" (행위 자체를 확인)


언뜻보면 뭐가 다른지 차이를 느끼기 힘든데 보통은 행위자체를 묻는 경우가 많고 러시아어를 배우다 보면 생각보단 금방 익숙해진다. 오히려 이렇게 안 쓰고도 대화가 가능한 다른 언어들이 더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어순이 있냐고 물어보면 없다고들 말한다. 실제로 의미의 차이가 조금 있지만 문법적으로는 어순에는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난 너를 사랑해"처럼 세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의 경우, 특별한 (혹은 생략된) 경우가 아니고는 어순이 바뀌는 경우는 없지만 러시아어로는 거의 모든 어순이 가능하다. 단어 3개를 나열하는 방법은 6가지가 되지만 실제로 자주 쓰는 어순은 두 가지 정도로 한국어와 같은 어순인 "난 너를 사랑해"와 "난 사랑해 너를" 정도가 된다. 러시아어는 동사에 주어의 정보(나, 너, 제삼자, 우리, 너를 포함한 복수, 복수의 제삼자)가 일부 포함되어 있기에 생략의 자유도가 한국어보다 높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배열하면 의미가 변질되기에 자연스러운 소통을 위해서는 어순을 익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으레 가지는 선입견으로 거친 러시아의 불곰 형누님들은 예의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 같으나 놀랍게도 러시아어에는 존댓말이 있다. 물론 영어도 좀 더 정중한 단어가 있지만 러시아어에는 단어선택이 아닌 동사에 존대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한국어처럼 따로 있다. 하지만 한국어와 다른 점은 존댓말을 사용하는 기준이 친근함이 되기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할머니 할아버지라도 가족끼리는 절대로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처음에 이들의 문화를잘 몰랐을 땐 러시아 친구가 자기 부모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너’라고 했을때 요런 예절머리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생각했다. 이성으로 만난 남녀사이에 있어서도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당연히 공적으로 만난 상대(학교 또는 회사 등)에게는 존칭을 사용한다. 식당이나 카페 직원이 ‘너’라고 하더라도 친근함이라는 표시니 아주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지만,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를 떠나는 날까지 심기가 불편했다.


참고로 러시아 사람을 부를 때는 짧은 이름을 쓴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이름은 짧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아나스타샤는 나스쨔, 알렉산드르는 사샤, 예카테리나는 카쨔로 부르는 식이다. 다만 공식석상이나 존대를 하기 위해서는 이름과 부칭(아버지의 이름)을 같이 부른다. 영어로는 미스터, 미스, 닥터, 주니어 등을 붙일 테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반 세르게예비치 (세르게이의 아들 이반), 이리나 미하일로브나(미하일의 딸 이리나)로 부른다.


처음 모스크바 세레메치예보 공항에 내려서 입학수속을 밟으면서 러시아인들의 불친절은 과장이 전혀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시간이 지나며 좀 변하긴 했는데 그 이유인즉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모르는 이방인에게 친절히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물며 기차의 동승객) 굉장히 예의가 바르게 되고 체면을 차리기 시작한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도가 달라질 때도 많았다. 거리에서는 거의 막말을 아무렇게나 일삼는 사람들이 러시아에서 만난 친구들도 너무나도 착했고 기차나 버스 등 몇 시간만 같이 앉아있게 되면 먹을 것도 나눠주고 꽤나 놀랄 정도로 친절했다.


그들도 이렇게 낯선 사람과 아는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말하길, 전부터 순진하도 숭고한 슬라브 민족(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 사람들 일부를 포함)이 외세에 수탈을 당하여 낯선 이에게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로는 푸쉬킨이란 러시아의 대문호가 ‘모르는 사람에게 미소 짓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라는데, 원인이 뭐가 됐든 나를 완전히 납득시키기에는 부족했다.


러시아에 도착하고 나서 러시아어를 조금 재밌게 배워보려 서점에서 러시아어 농담집을 구입한 적이 있다. 초보자를 위한 책이어서 그런지 모르는 단어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읽는 것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처음 몇개를 읽었을 땐 내가 잘 이해를 못 하고 있나 싶었는데 근데 몇 개를 읽어도 도통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몰랐다. 러시아 친구를 불러서 같이 좀 봐달라했더니 첫 농담부터 빵 터지면서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어이가 아주 없었지만 정중히 어느 부분이 웃기냐고 물어봤고 친구가 아주 친절히 웃음 포인트와 설명을 해주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웃음에도 번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러시아인들이 추위에 강하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인 듯하다. 한국에서 러시아어 학원을 다닐때 원어민 강사가 있었는데 날이 조금만 추우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꽁꽁 옷과, 모자, 장갑 등으로 덮고 왔다. 분명 러시아는 엄청 추울텐데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을 맴돌았다. 러시아에 도착하니 러시아어 선생님같은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런면에서 모든 러시아인들이 육체적으로 추위에 강하다는 말은 틀린 말인 듯하다. 게다가 러시아에선 실내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건물에서 히터가 무료로 너무 따뜻하게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이 추운 날씨 때문에 추위에 익숙한 신체적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을 듯싶다. 러시아인들이 추위에 강한 이유는 체질이 아니라 장비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여자를 부를 때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한다. 전체가 아주 하얀 백발의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할머니’라고 부르는 건 대단히 실례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러시아어 선생님이 자신에 대해서 묘사해보라 해서 ‘살짝 고약하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착한 할머니’라고 했다가 한두시간 정도 핀잔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아줌마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아줌마라고 하는 것도 실례라하고 아줌마라는 단어는 공항에서 들었는데 순한맛 욕설처럼 쓰이더라. 그러면 모르는 러시아 여성을 부를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러시아 여성들은 다 ‘제부시카(아가씨)’라고 부르면 된단다. 러시아에서 생활하며 아줌마와 할머니한테 혼이 쏙 빠질만큼 혼나고 나면 그들을 아가씨라고 부를 맘에 손톱만큼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매우 달랐다. 그렇다고 못살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친근하다고 느끼기에도 무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내가 그들의 다름을 순순히 인정하기에 부족한 사람이기에 내 그릇을 더 키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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