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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an 13. 2019

15. 국제기구 컨설턴트 오퍼, 그리고 정규직 인터뷰

반복되는 일희일비 속에 다시 세상에 나오다

학교에서 국제기구 입사를 목표로 정보를 수집하다 곧 알게 된 사실은 들어가는 방법이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단 공채라는 것이 있기는 하나 매우 적은 수에 불과하고 외부인이 수시로 뜨는 공고에 지원해서 바로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계약직 컨설턴트로 시작하여 기구의 분위기를 익히고 경험을 쌓은 후 정규직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일단 이 나이에 계약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겁도 나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컨설턴트로 시작하는 것 자체도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여름에 World Bank에서 컨설턴트 자리를 얻었던 네덜란드 친구는 그 자리를 얻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해야 했다며 표정으로 그것이 쉽지 않은 과정임을 말해 주었다 (첫 학기 당시 나는 순진해서 몇몇 국제기구의 여름 인턴 지원서를 제출해 놓고는 연락이 오지 않으려나 그저 기다렸다. 그리고 역시 아무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학교에서 한 개발은행 (Multilateral Development Bank)의 에너지 전문가가 학교에 와서 신재생에너지 발전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미나를 진행한다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평소에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나는 해당 분야에 대한 실무 경험도 들어 보고 점심도 얻어먹을 겸 해서 세미나에 참석했다. 샌드위치를 조용히 씹어먹으며 내용을 듣다 보니 매우 흥미로웠고 좋은 질문거리도 하나 생각났다. 이 시점에서 살짝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잘 정리한 질문을 하나 던지자 강연자가 매우 좋은 질문이라며 잘 답변해 주었다. 그에게 일단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강연이 끝난 후 언제나 그렇듯 국제기구에 관심이 많은 몇몇 학생들이 줄을 서서 감사 인사/추가 질문과 함께 명함을 건네며 짧은 네트워킹을 시도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다행히 강연자는 다음 스케줄이 바로 있거나 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내 차례가 왔고, 나는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내가 이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여름 인턴 경험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강연자는 좋은 질문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마침 에너지 인프라 프로젝트의 파이낸셜 모델 일 같은 것에 경험/관심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의 나는 infrastructure finance의 경우 수업에서만 접했을 뿐 실제 경력이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이 시점에서 불필요한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강연자는 자신이 파이낸셜 모델 일을 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서 나에게 아마도 연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나와 명함을 교환했다. 예상치 못한 빠른 전개에 나는 놀라우면서도 뛸 듯이 기뻤다.


그 날 이후 이 사람은 내가 보낸 이메일에 1주일 정도 있다가 답장을 하거나 출장 중이라며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한 후 잠수를 타는 등 내 속을 약 2달 정도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전화하여 컨설턴트 계약서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일당은 자기가 보기에 하루 세후 300달러 정도면 적당할 것 같으니 받아들이던지 더 생각해 보던지 하라고 했다. 당시 나는 학생으로서 주 150달러 정도를 받으며 수업조교 생활을 하고 있던 터인데 하루 300달러라니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한 달을 20일로 따지면 세후 6,000달러인데, 이 정도면 나중은 몰라도 현재 학생 신분으로는 매우 훌륭해 보였다 (이 계산이 이렇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나중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게다가 여기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가는 이 사람이 앞으로 또 얼마간 연락이 안 될지, 연락이 다시 오기는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잠깐 생각하고는 바로 하겠다고 했다. 그가 알겠다며 전화를 끊더니 이윽고 해당 MDB의 program assistant에게서 연락이 왔다. ‘계약서에 사인해서 다시 보내주세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학교 도서관에서 계약서를 출력하여 사인하고 스캔했다. 복사기/프린터의 찰칵찰칵 하는 소리가 멜로디로 들렸다. 이윽고 program assistant가 내게 컨설턴트로서 일한 시간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는 웹사이트의 주소와 로그인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 사원번호 6자리를 알려 주었다.


이렇게 나는 재학 중에 국제기구의 STC (Short Term Consultant)가 되었다. 두 달 동안 마음고생을 하긴 했으나 비교적 수월하게 국제기구의 첫 관문을 뚫은 셈이었다. 이 사실은 나와 마찬가지로 국제기구의 문을 찾아 여기저기 네트워킹을 했지만 아직 기회를 찾지 못한 동기들 몇몇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나 스스로도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취업이 잘 안 풀리더라도 나쁘지 않은 Fallback 옵션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해졌다. 동기들에 비해 졸업 전후에 취업 스트레스를 비교적 덜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 첫 관문 이후 나의 국제기구 정착까지의 길은 많이 꼬였고 이 STC 포지션도 돌이켜 보면 좋은 시작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길이 꼬이는 데 더 기여를 했는지도 모른다).


컨설턴트 자리는 얻었지만 정규직 공채에도 당연히 지원했다. 앞에 언급했다시피 국제기구에는 공채가 매우 제한적이지만 있기는 있다. JPO와 같이 각 회원국에서 직접 뽑아 급여를 지원해 주면서 2-3년씩 기구에 보내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기구 자체적으로 YP (Young Professional)이라고 하는 채용 프로그램 같은 것이 매년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석/박사와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그런 만큼 YP출신은 조직 내에서도 좀 더 특별한 대접을 받고 향후 승진 등에서도 선호된다고 여겨진다. (한국 군대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육사 출신 장교와 기타 출신 장교들의 차이라고 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 프로그램은 보통 30대 초반 정도로 나이 제한이 있는데, 한 MDB의 민간 부문 투자 조직에서는 당시 나이 제한이 없었고 내가 지원할 수 있었다.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깨달은 나는 이 자리를 위해 나는 해당 기구에 근무하는 한국 분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얻었다. 한 친구는 너무 고맙게도 YP 프로그램 매니저에게 내 CV를 보내 추천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상당한 경쟁을 뚫고 인터뷰 기회를 받을 수 있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시행된 이 인터뷰를 나는 많이 준비하고 열심히 임했다. 스카이프로 이루어진 1차 인터뷰에서 나는 초 중반까지는 준비된 멘트를 잘 풀었다. 면접관은 마침 프로그램 매니저 본인이었는데 나를 추천한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구두 케이스 면접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예년에는 1차 면접의 경우 CV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초 긴장 상태로 불러주는 정보들을 받아 적었다. "Take your time."이라고 인자하게 말하는 프로그램 매니저의 얼굴이 코앞 아이패드에 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답을 생각해야 했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던지 는 힌트를 조금씩 주면서 나를 이끌어 주려고 했지만 나의 내공이 부족한 탓에 결국 케이스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1차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고 나는 이후 연락을 받지 못했다. 너무도 아쉬웠지만 내가 부족해서 날린 기회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기존 MDB 컨설턴트 일에 집중하면서 다른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을 2달 정도 앞둔 시점에 수업 중 온 전화를 못 받았는데 나중에 음성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내가 인터뷰를 봤던 YP 프로그램 매니저였다. 전화를 해 보니, 올해 YP 프로그램에 일부 인원을 추가 선발하기로 했다면서 최종 인터뷰 4인에 내가 선발되었다고 말했다. 졸업을 앞둔 타이밍에 최종 인터뷰 기회가 이렇게 다시 주어지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내 머릿속은 오로지 지난번 실패를 발판 삼아 이번 인터뷰는 정말 제대로 준비해서 이 기회를 반드시 잡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최종 인터뷰는 후보자 4인의 공동 케이스 스터디, 모델링 테스트, 그리고 두 번의 패널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인터뷰를 며칠 앞두고 받은 케이스 스터디는 마침 HBS의 케이스였다. 나는 HKS 동기들과 HBS 친구들을 수소문해서 기어이 그 케이스를 다룬 수업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수업 노트까지 손에 넣었다. 덕분에 케이스 준비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모델링 테스트는 역시 인맥을 통해 비슷한 스타일의 모델 테스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도록 연습을 많이 했다. 인터뷰도 현직에 있는 분께 몇 가지 포인트를 잡아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고 그분의 대답에 맞춰서 준비했다.


면접날이 되었다. 각각 이집트, 카자흐스탄, 콩고 출신의 면접자들과 한 방에서 케이스 스터디와 함께 면접이 시작되었다. 2대 2로 팀을 짜서 각각 발표를 하고 이 투자를 할지 말지에 대해 토론하면 옆에서 면접관이 지켜보며 종합 평가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 케이스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모델을 작성하여 깔끔하게 결과를 가져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렇지만 토론을 혼자 주도하려고 하지 않고 팀원과 잘 협업했으며 모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좋은 팀원이라는 인상을 주는 데 힘썼다. 케이스 스터디는 아무래도 내가 가장 잘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차례 면접에서는 면접관 운이 좋았다고 느껴졌다. 첫 번째 면접의 면접관 중 한 분은 우리 학교에서 executive education 과정을 들은 분이었다. 내가 수업조교를 했던 두 수업의 교수분들과 아는 사이어서 면접 이후에 교수님께 추천 이메일을 부탁했고 실제로 잘 써준 추천서를 보내 주셨다. 두 번째 면접의 면접관 중 한 분은 한국인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좀 더 편했다. 마지막 모델링 테스트는 내가 연습한 모의 테스트에 비하면 쉬운 내용이었다. 나는 주어진 시간보다 여유 있게 테스트를 마치고 검토까지 완벽히 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DC의 레이건 공항에서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의 느낌이 기억난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비췄고, 나는 면접을 잘 본 것 같다는 생각에 노곤하고 뿌듯했다. 그날 밤,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 (레드삭스의 홈 야구장) 클럽 라운지에서 학교 파티가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아내와 즐거운 저녁을 만끽했다. 그때 친구가 찍어준 사진이 있는데, 내 표정이 정말 티 하나 없이 밝았다. 나는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합격을 예감하며 기분 좋은 졸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프로그램 매니저에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들뜬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매니저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지만 자네와는 이 채용 건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왜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패널 면접 심사관들의 피드백을 직접 하나하나 읽어 주었다. ‘기존 경력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임’,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답변이 설득력이 없음’ ‘답변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 아직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나는 구차하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는데 프로그램 매니저는 친절하게도 모든 질문에 정성 들여 다 답을 해 주었다. 면접은 잘 못 봤다 하더라도 테스트 점수는 혹시 괜찮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패널 면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보조적인 역할이라고 답했다. 모델링 테스트 같은 것은 너무 기본적인 것이라 당락을 결정하기보다는 기본 자격심사 정도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4명 중 내가 가장 먼저 결정된 탈락자이고 나머지 3명은 아직 심사 중이라는 답변은 나의 자존감을 더욱 떨어뜨렸다 (이후 한동안 나는 denial모드에 빠져 내가 diversity hire의 피해자가 된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저 내가 인터뷰를 망친 것이 맞다). 이번에는 좀 더 기대를 했던 탓일까,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을 정도로 나의 실망감은 컸다. 나와 더불어 기대하고 있던 임신한 아내에게 소식을 전하기도 너무 미안했다.


이 상태로 나는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나에게 컨설턴트 자리를 준 에너지 전문가는 첫 계약이 끝난 시점에 내가 재계약 관련하여 이메일을 보내자 갑자기 연락이 되질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졸업 전에 국제기구의 계약직 자리를 얻었고, 정규직 최종 면접에 초대된 신분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실직한 대학원 졸업생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직장도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봤어야 하는데 방심하다 모든 기회를 다 날리고 말았다는 회한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아내의 출산일이 가까워졌고, 이 모든 것을 잠시 잊은 채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맞을 준비를 했다. 예정일에 아이가 잘 태어났고, 병원에서 아이를 카시트에 실어 다 함께 병원을 나오는 길이었는데 에너지 전문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마친 후 내가 조심스레 재계약에 대해 물었더니 그가 무신경하게 말했다. “그거 저번에 이미 연장한 것 같은데. 내가 이야기 안 했나?” 이야기를 하긴 언제 했단 말인가. 하지만 찾아보니 계약 연장은 되어 있었다. 나의 무거운 마음이 그나마 조금 가벼워졌다.


그렇게, 나의 졸업 후 미국에서의 첫 직장생활은 새로 연장된 ‘30일 계약’과 함께 시작되었다. 일단 가면 좀 더 많은 기회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우리 가족은 보스턴을 떠나 새 직장이 위치한 워싱턴 DC로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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