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재희 Feb 18. 2019

14. 늦은 유학이 내게 선사한 것

잃어버린, 혹은 다시 찾은 5년?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2년(사실은 1년 9개월)이라는 시간이 결국엔 지나가고 어느덧 졸업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졸업식을 Commencement라고 부른다. Commencement의 사전적 의미는 ‘시작'인데, 그래서 처음에는 입학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졸업과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시작 또는 학위 보유자로서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똑같은 행사인데 부르는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다른 걸 보면 졸업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인가 (할 일 다 했다 vs. 준비 끝났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졸업식 날은 아주 화창했다. 한국에서 하는 졸업식에서는 학사모를 쓰고 가족들과 한바탕 사진을 찍은 후에, 실제 졸업식 자체는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미국의 졸업식은 조금 달랐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꽉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먼저 우리 단과대 안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이어서 하버드 모든 단과대의 졸업생들이 함께 야드(학부 캠퍼스)로 이동했다. 모든 단과대 졸업생들이 함께 모여 앉아 졸업식을 진행하는데, 단과대별로 자신들의 상징물을 하나씩 들고 다니다가 자기 단과대 이름이 호명되면 그것을 하늘로 던지는 순서가 있다. 예컨대 로스쿨은 판사봉(gavel)을, 메디컬 스쿨은 청진기를, 교육대학원은 동화책을 던지는 식이다. 우리 학교는 지구본 풍선을 던지는데 (개인적으로 우리 학교의 상징물이 제일 마음에 든다. 졸업가운 색깔과 대비도 훌륭해서 사진도 잘 나온다) 그 장면이 장관이다. 졸업식이 진행되는 동안 푸른 하늘과, 함께 앉아있는 졸업 동기들과, 야드 뒤쪽을 가득 메운, 전 세계에서 날아온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약간은 자랑스럽기도 하고, 이게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의 마지막이라니 애틋하기도 하고, 이젠 정말 학교라는 ‘인생 방학'이 끝나고 다시 냉정한 세상으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다.


Government! (HKS의 풀 네임은 John F. Kennedy School of Government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우리 단과대로 돌아와서 학위 수여식을 하는데, 내가 졸업식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학생들이 행사장으로 입장하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면 양쪽에 교수들과 교직원들이 똑같이 졸업식 가운과 학사모를 쓴 채 도열해서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는데 마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하객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지나가며 축하를 받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학생들이 교수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축하 인사를 전하는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학생이 진정한 학교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지나가다가 친분이 있는 교수님들을 보면 더욱 반가워 악수를 청하고 포옹을 하기도 하면서 학위 수여식장으로 입장했다. 내 모든 동기들의 이름과 내 이름이 마침내 호명되고, 졸업장을 받았다. 내려오는 길에 사진을 찍고, 기다려준 EY 그리고 보스턴까지 날아오신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실 취업이 생각대로 풀린 상황이 아니어서 졸업식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아들 졸업식이라고 미국까지 날아와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나름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한눈에 보기에도 종일 들뜨고 신난 표정이었던 아버지를 보니 좋았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처음으로 대학원 합격을 알린 순간에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합격을 알린 순간 언짢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가로 젔더니 “너는 지금 인생에서 뭐가 더 중요한 건지 모르고 있어… 지금 너는 결혼을 해야 돼 유학이 문제가 아니라”라고 이야기하셨던 분이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하던 분이 그래도 졸업식장에 오니 싱글벙글해서 다행이었다 (하긴 내가 결혼까지 했으니 딱히 걱정할 일이 없었는지도). 그렇게 나의 졸업식 날은 저물어 갔다.


3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유학을 오면서,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동기들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더 쌓은 채 유학을 왔기 때문에 졸업할 때는 그런 것들이 그대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내가 유학 이전에 일하던 지역과 업계로 그대로 돌아간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새로운 도전을 택했기 때문에 직업시장에서 나는 그저 대학원을 갓 졸업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대리급 사원으로 리셋된 것이었다. 느낌으로는 Senior 포지션이나 팀 리더 같은 포지션에 지원해야 될 것 같았지만 사실상 Associate급으로 지원해야 그나마 고려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매우 당연하고 공정한 상황이었다. 나는 한국과 중국의 금융투자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는데 유학을 온 후 지역도, 인더스트리도 바꿔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Senior포지션에 요구되는 능력과 경험을 실제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유학과 새로운 도전을 통해 커리어상으로는 ‘잃어버린 5년'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꼭 커리어 쪽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2년간 함께 지낸 동기들이 모두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어서 일상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화제도 한국에서 대학/직장 동기들과 이야기하던 화제에 비하면 훨씬 젊어졌고 순수해졌다. 아직 인생을 더 즐기고 싶고,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살아있고, 가진 것을 지키기보다는 가지고 싶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단계에 있는 동기들과 지내다 보니 사생활도 30대 초반으로 리셋된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내가 한국/중국에서 30대 중반까지 살다가 유학을 와서는, 여기서 다시 30대 초반으로 시간을 돌려 인생을 한 번 더 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갑자기 사원/대리급으로 좌천되어 나보다 5살 어린 친구들과 같은 직급이 되었고, 내 친구들은 모두 나의 상사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들 새로 만난 사람들이고, 대부분 나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데다가, 동양인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몇 살 젊게 사는 것이 딱히 부담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는 더욱 활력 있는 상태가 되었다 - 상해에서 일할 때 나는 팀장으로서 주로 보고를 받는 쪽이었고, 리서치나 모델 같은 것은 팀원들에게 다 시켰으며 영업과 고객 관리를 하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아무리 경계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나른한 꼰대가 되어 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을 와서는 수업 과제를 위해 오랜만에 내 손으로 직접 엑셀 모델을 짜서 돌려야 했고, 여름에 ‘인턴십'을 위해 첫 출근할 때는 마치 대졸 신입사원처럼 두근거렸으며 졸업 즈음에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에도 새로운 희망, 기대감, 의욕이 넘쳐흘렀다. 군기가 바짝 든 사회 초년생 같은 상대가 되었는데 뭐랄까, 약간 짜증이 나면서도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가끔씩 한국에 있는 동기/후배들이 사회의 중심이 되어 잘 나가고 있는 소식을 접할 때면 나만 외딴곳에서 후퇴한 느낌이 들어 초조해지고 위축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느낀 것은, 역시 우리의 삶은 남과 비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만족도가 크게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모든 사회관계를 끊고 살지 않는 이상 그런 비교가 사실상 피할 수 없이 강제된다고 한다면 이곳에서는 비교를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 한다면 누구와 비교할 것인지를 어느 정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달랐다 (이것은 한국과 미국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오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왔기 때문이다 - 한 프랑스 친구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좋은 점이 뭐냐는 질문에 ‘파리에 살면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되고 은연중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아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이 좋다’고 했다. 결국 누구나 느끼는, 집 떠난 데서 오는 일종의 해방감이다). All in all - 유학이 내게 미친 모든 긍정적 부정적인 요소를 다 고려해 볼 때 나는 유학이 내게 가져다준 변화가 좋았다. 어떤 부정적인 요소도 나 자신의 성장, 시야의 확장, 그리고 인생 방향의 리셋이라는 긍정적인 변화보다 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전 15화 13. 나는 왜 성과를 양심보다 중요시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