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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Feb 06. 2019

12. 20년 만의 글짓기

Column and Opinion Writing 수업

내가 HKS에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에 맞게 다양한 수업이 제공된다는 것이었다. 나 같은 민간 금융계 출신에게 익숙한 수업도 있고, 정치인이나 외교관 출신들을 위한 국제정치 수업과 언론계 종사자들을 위한 미디어 수업도 있으며 그에 더해 soft skill 수업들도 있었다. 물론 졸업 후 커리어를 생각해야 하니 어느 정도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지만 내가 평소에 전혀 접하지 못하던 분야의 수업을 한 번씩 들어보는 것도 흥미로웠고 내 인생에 좀 더 다채로운 색을 더하는 것 같아 좋았다. 그렇게 수강한 과목 중 하나가 바로 Column and Opinion Writing이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글쓰기 수업을 수강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글이라고는 초등학교 글짓기로 반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작가 인생의 정점을 찍은 이후 사실상 무언가를 차분히 써 본 기억이 없었다. 오랫동안 글쓰기 자체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가 이 수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 HKS에서는 수강 이전에 강의 평가 점수/교수 평가 점수를 모두 공개하는데 이 수업이 바로 둘 모두에서 최고점을 받은 수업이었던 것이다. 대체 어떤 수업이길래 하는 호기심 때문에 쇼핑 기간에 청강이라도 해 보려고 들어갔다.


강의실은 일반 강의실이 아닌 교내 연구센터 내의 서재 같은 (마치 ‘작가와의 대화’ 같은 이벤트를 할 것 같은) 공간이었고, 20명 미만의 적은 인원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토론하는 구조였다. 신문사 또는 잡지사 편집실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의 Jeffrey Seglin 교수가 들어와 수업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분이 글쎄 너무 매력적이었다. 매우 친절하고, 배려심 많으면서도 샤프하고 유머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뭔가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유형이었다. 쿨하거나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일과는 달리 부드럽고 공손하면서도 엣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없었지만 이 수업을 꼭 듣고 싶다는 생각에 경매 포인트를 수강신청에 올인했다.


수업 초반에 내게 정말 어려우면서도 흥미로웠던 것은, 미국의 다양한 인쇄 매체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고 다 같이 그들의 성향을 하나씩 밝힌 다음 내 글은 어느 매체를 타깃으로 쓸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과정이었다. 일단 미국 인쇄매체는 Washington Post나 NYT 정도만 알던 나는 이러한 메이저 언론사는 물론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수많은 매체들을 내 반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잘 알고 있고, 그 매체들이 좌-우 스펙트럼 중에 어디 정도에 위치하는지, 그들만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매체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 지식이 해박하다는 데에 놀랐다. 학생들이 모두 언론계 종사자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텐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글쓰기에 관심 많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었다. 나는 한국의 언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생각해 봤다. 조중동이 보수, 한겨레 경향이 진보인 것 정도는 알지만 그들 각자의 성향과 논조는 어떠한지, 나는 그중 어떤 언론을 특별히 선호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각자 성향을 명확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논조에 일관성은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게다가 주간/월간지 시장은 제대로 자리 잡은 시사 매체가 있기는 한지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자리에 앉아 미국 매체의 다양함과 그들 간의 미묘한 성향의 차이에 대해 멍하니 계속 듣고 있다 보니 뭐랄까, 조금 과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수준 차이가 느껴졌다. 한국에 비하면 언론 공급자나 소비자 양쪽 모두에서 미국이 확실히 좀 더 수준이 있구나 라는 느낌 말이다.


예컨대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샌드위치 집에서 좀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치즈를 고르는 일이었다. 동네의 허름한 Subway 같은 곳에 가더라도 최소 American, Provolone, Swiss, Pepper Jack, Cheddar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샌드위치 좀 맛있게 한다는 힙한 집에 가면 여기에 더해 Gruyere, Havarti, Munster, Manchego, Asadero 등 이국적인 치즈의 종류가 더 많아진다. 슬라이스 치즈라고는 노란 치즈와 하얀 치즈 정도만 알던 나에 비하면 미국인들 - 정확히는 유럽인들과 그 영향을 받은 후손들 - 은 그야말로 치즈에 대한 지식, 경험, 취향이 나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그 문화를 더욱 수준 높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건 김치를 예로 들면 정 반대가 된다. 아무리 요즘 미국에서 김치가 쿨하게 뜨고 있다고는 해도, 심지어 김치를 재료로 애용하는 유명 미국인 셰프의 레스토랑에 가도 김치는 그냥 ‘Kimchi’ 일뿐이다. 겉절이부터 조금 익은 김치, 신김치까지의 차이와 물김치, 갓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등의 명백한 차이는 미국인들에게는 아직 너무 어렵다. 한국인들은 김치에 관해서는 훨씬 수준 높은 이해와 취향을 가지고 즐기고 있다). 이 같은 비유를 언론계에 적용하여 이야기하면, 미국 및 서구권의 교육을 받은 대학/대학원생들은 비교 가능한 한국의 학생들에 비해 어떤 언론과 어떤 매체가 어떤 논조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성향은 어떻고 내 입맛에 잘 맞는 매체는 무엇인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더 수준 높은 이해와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의견의 차이에 대해 표현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더욱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요자들이 수준이 있으니 공급자인 언론도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일관적이고 수준 있는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가짜 뉴스와 클릭 낚시, 트럼프의 트위터가 업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은 미국의 언론계도 고민이 많아 보인다).


초반 세션 이후, 이 수업은 수강생 각자가 자신이 한 학기 동안 쓸 5편의 글을 위해 10개의 제목을 정하고, 하나씩 글을 쓴 후 수강생 모두가 그에 대한 논평을 하는 사이클로 전개되었다. 글 제목 정하는 시간에 내가 생각보다 아이디어가 많아 놀랐다. 마치 배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먹기 시작하니 술술 들어가는 것처럼, 딱히 쓰고 싶은 내용이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새 쓰고 싶은 글 제목이 계속 떠올랐다. 재미있는 것은 제목을 정하는 이 단계에서부터 이미 글 쓰는 이들의 스타일이 잘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에 관심이 있는 한 학생의 경우 모두 교육과 관련된 주제로 대부분의 제목을 채웠다. 다른 친구는 자신의 관심분야, 예컨대 중동 국제정세에 대한 제목 몇 편, 그리고 자전적 에세이 몇 편, 이런 식이었는데 그의 직업적 관심과 개인적 고민의 영역이 잘 보이는 리스트였다. 나의 제목 리스트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고, 대신 한 분야에는 둘 이상의 제목이 나오지 않은 만큼 심도는 없었다. 아마 나의 산만한 이력서와 잡다한 관심 분야가 자연스럽게 드러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새 첫 번째 글을 완성했고, 교수의 피드백이 왔다. 결과물을 받아 보니 이 수업이 글 쓰는 수업인지 영작 빨간펜 수업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문법과 표현에 실수가 많아 내가 보기에도 민망했다. 수강생들의 평론도 딱히 인상적인 반응이 없었다. 검토도 제대로 안 하고 제출했다는 자책과 함께 내가 아직도 이렇게 기본이 부족한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문법적인 실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매우 제한적이지만 일부의 칭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목을 잘 뽑았네요. 그리고, 음... 제목을 잘 뽑았어요” 같은). 한 학기 동안 다섯 편의 글을 창작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특히 이 수업은 주제가 Column and Opinion이다 보니 나의 의견을 제시해야 하고, 의견을 제시하려면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사고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나오는 대로 쓰다 보면 수습이 잘 안 됐다. 제목 정할 때의 패기는 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현실의 벽 앞에 많이 수그러들었다. 결국 글 하나는 다른 수업에 어차피 써서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를 살짝 편집해서 제출하기로 하고 나서야 겨우 다섯 편을 채울 수 있었다. 마침내 끝냈다는 후련함과 동시에, 이제 Jeff(Seglin 교수)와의 수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다. Jeff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계속 쓰세요. 멈추지 말고, 계속 쓰세요.”


어떤 수업은 현장에서 바로 강한 깨달음을 주면서 뇌리에 남기도 하고, 어떤 수업은 현장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지나고 나서 은근히 내 삶에 계속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수업의 경우는 후자였던 것 같다. 수업 당시에는 낯선 내용도 많았고 글 다섯 편 쓰는 것을 따라가느라 무언가를 느낄 틈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 수업의 이미지라던가 분위기가 가끔 떠올랐고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다 졸업 후 2년 정도 지난 어느 시점에 나는 불현듯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때의 글쓰기 수업의 기억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에도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대상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대답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생각을 묵히면서 지냈는데, 답을 찾기 어려워 고민이 될 때 떠오른 것은 Jeff의 “쓰세요"라는 메시지였다.



*그렇게, 어느 순간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다 보니 독자분들도 생겼네요. 관심 갖고 읽어 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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