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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Dec 31. 2018

13. 나는 왜 성과를 양심보다 중요시했나

Heifetz 교수의 리더십 수업 - Do better!

하이페츠 교수의 리더십 수업은 아마도 HKS 졸업생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수업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람의 이력은 특이하다. 의사(정신과)였던 그는 커리어 초반에 리더십 강사로 변신하여 저술 및 강의를 해 왔다. 그는 상당수의 극성팬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 어떤 컬트적인 추종을 받는다. HKS를 거쳐간 거물 정치인 등이 중요한 순간에 그를 찾아 자문을 구한다는 소문도 돈다. 물론 그를 싫어하거나 냉소적인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수업을 들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경험이 기억에 남을 것이고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냉소적인 부류 중 하나였다. 리더십 강의라니, 사장님들 모여서 골프 치러 다니시는 최고 경영자 과정 같은 것이 떠올랐다. 한 학기 동안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하다가 나와서는 ‘리더십을 글로 배웠어요’ 하면서 자화자찬하는 수업이 아닐까? 하지만 이 수업의 명성이 결국 hype에 불과하더라도 그걸 나 스스로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수업은 두 코스로 이루어져 있어서 첫 학기 수업 (자신과 타인의 리더십 실패를 객관적 틀로 분석하는 과정)을 듣지 못하면 두 번째 수업 (리더십 실패 경험을 좀 더 개인적, 주관적 수준으로 파고들어 가는 과정)을 들을 수가 없다. 나는 첫 학기 수업은 하이페츠 본인이 아닌 부교수로부터 들었고 그다음 J-term (1월 한 달간 집중적으로 한 학기 과정을 이수하는 일종의 계절학기)에 하이페츠의 수업을 들었다. 첫 학기 첫 시간 수업이 기억난다. 교수가 들어와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몇 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뭔지 모를 어색함과 불안감이 강의실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다 견디지 못한 한 학생이 무언가 질문 또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여러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교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것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이 리더십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와 같은 주제에 대해 점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이윽고 교실 전체에 에너지가 넘치는, 누구 한 명 집중하지 않는 사람 없이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수업이 되었다. 발표 기회를 교수가 지정하지 않다 보니 말이 빠른 친구들이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고 할 말을 하지 못한 친구들의 좌절감 수준이 높아졌다. 수업 자체의 긴장감이 점점 상승하고 통제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교수가 그제야 몇 마디를 하며 토론을 가이드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학생들은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하고, 왜 누구는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분석하느라 다음 수업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첫 시간을 통해 이 수업의 방법론이 확실해졌다. 우리 모두가 실험쥐가 되는 동시에 관찰자로서 그것을 바라보며 스스로 생각하고 배워나가는 것이 이 수업의 방식이었다. 첫 수업 이후 조직의 행동과 리더십에 대한 약간의 이론적 분석적 틀을 배운 이후 나머지 시간들은 학생 한 명이 ‘자신의 실패 사례’를 가져와 발표하면 나머지 모두가 그는 왜 실패했고 어떻게 해야/했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대신 개개인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민감한 사항들이 거론되기 때문에 수강생 모두는 수업에서 들은 것은 수업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비밀 서약을 한다).


흥미로운 한 학기를 마치고, 드디어 그 하이페츠의 수업을 들을 1월이 다가왔다. 나는 당시 짧은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EY, 처제와 함께 셋이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수업 시작 전날에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아뿔싸! 나와 EY의 의사소통에 착오가 생겨 수업 이틀 전에야 비로소 내 비행 일정이 수업 전날이 아닌 첫날에 돌아가는 일정임을 알게 되었다. 첫날을 빠질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다. J-term 수업은 하루에 8시간씩 2주간 진행되는 수업으로 하루를 빠지면 총수업의 1/10을 빠지는 셈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비행 일정을 바꾸려면 수수료가 비행기표를 새로 사는 것만큼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하이페츠 교수에게 비행 일정을 바꾸지 못해 첫 수업을 빠질 수밖에 없어서 죄송하다고 이메일을 썼다. 그러자 한 시간도 안 되어 답장이 왔다. ‘전화 요망’. 다급하게 전화한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화가 난 하이페츠 교수와 첫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내가 이 수업을 듣고자 했지만 선택되지 못했던 수많은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인지를 매우 강조했다. 그리고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나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당장 일정을 바꾸어 지금이라도 날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면 급행 티켓을 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단지 수업 한 시간을 빼먹지 않기 위해 그 돈을 들여서 올 만큼 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그럴 의지가 없었을 뿐). 나는 ‘아니 뭐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어쨌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을 하니 그만큼 진지하게 준비 하기는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반성문(?)을 써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다 들어도 학점을 줄지는 나중에 판단하겠다는 엄포도 들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수준을 넘어 아주 단추가 후드득 떨어져 나간 듯한 시작이었다.


수업은 흥미로웠다.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각자의 실패 사례를 깊게 파내려 가다 보니 긴장 수준도 더 높아졌고 각자가 이입하는 감정의 강도 역시 커졌다. 리더십 수업이라기보다는 집단 사이코 테라피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소그룹별로 모두 자기 사례를 발표하고 각 조당 한 사람은 수업 전체 인원 (100명쯤 되었던 것 같다) 앞에서 다시 한번 발표를 한다. 우리 조의 케이스 발표자로 내가 선정되었다. 나는 중국에서의 한 에피소드를 발표했다 - 중국 법인 운영 초기에 실적의 압박이 다소 있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데, 시각에 따라 협력사 팀 쪽에서 배신감을 느낄 수 있는 행위를 했다 (당시 나는 직원 3명과 회의를 했는데, 한 명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정당한 행위이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입장, 나머지 둘은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는 행위라는 의견이었다). 그 결정 이후 실제로는 그쪽 팀 자체가 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그들과의 관계도 비즈니스 니즈에 따라 회복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은 전무했다. 따라서 실제 실패 사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따라 충분히 큰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긴가민가 하며 발표를 했지만 반향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어떤 학우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실망했다며 비즈니스 파트너를 존중하지 않는 그런 사람과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부 학생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뭐가 그리 나쁜 일인지, 아마 자신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좀 더 분석적인 그룹에서는 그쪽 팀에서 일부러 나를 테스트해 보기 위해 던진 미끼를 내가 덥석 문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내가 가장 공감하게 된 의견은 이것이었다 - 당시 상황에서 내가 얼마나 강한 실적의 압박을 느껴야 했는지 맥락을 알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내용을 들어 보면 그렇게 강하게 압박을 느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비즈니스상의 신의 또는 매너보다 실적을 더 우선시하면서 그것을 사업상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포장하여 정당화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살아온 배경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딱히 성적이나 성공을 강요하는 분들은 아니었다. 그러자 뒤이어 나온 의견은 포커스를 사회 시스템으로 확장시켰다. ‘네가 살아온 사회가 실적과 성공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면서 사람 간의 신의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학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라는 해석이었다.


나는 이전까지 ‘안 되면 사회 탓’을 하는 사람은 딱히 아니었는데, 이 해석은 이상하리만큼 공감하게 되었다. 나는 30년 넘게 살면서 결과중심주의적인 사고 - 즉 사람은 잘 되면 (돈 잘 벌고 힘 있고 유명해지면) 그 과정에서의 흠결은 놀랄 만큼 쉽게 잊히고 심지어 정당화되기까지 하기 때문에 무조건 잘 되고 볼 일이라는 - 가 확실히 학습되었는데, 그건 한국사회라는 거대한 교실에서 보고 배운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동아시아권 (한국, 중국) 학생들은 수업 중에 나의 행위에 딱히 도덕적인 비난을 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끼를 문 것이라는 의견도 중국 학생들 중심으로 나왔다. 압축 고도성장을 겪으며 결과와 성과가 가치보다 항상 우선시되는 것을 지켜보며 성장한 우리들은 매너나 신의 같은 것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반응을 차단하도록, 그리고 성과나 개인의 생존에 더 치중하도록 학습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윽고 하이페츠 교수가 개입했다. 이미 나를 뻔뻔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평소와는 달리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보다는 약간의 감정을 실어, 나를 보고 훈계하듯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에서의 네 결정은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었고 그것은 충분히 큰 실패로 이어질 수 있었다. 너는 운이 좋았어. 너는 충분히 재능 있는 사람이니 그런 식으로 살 필요가 없다. 네가 자라온 가정과 사회의 영향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땠던지 간에 지금의 너는 그런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라. 너는 이것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DO BETTER!” 이런 이야기를 면전에서 듣고 ‘아 네 그러네요’ 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뭐 그리 나쁜 일을 했나?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한국사회에는 노골적인 반칙을 일삼는 인간들 천지인데, 나는 나름 정직하게 살아왔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걷힌 상태에서 보면 그의 메시지는 옳았다. 나의 선택은 분명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여 장기 변수를 과소평가한 결과였고,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는 감정적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결정이었으며, 실제로 큰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하이페츠를 좋아한다거나 그의 팬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수업과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고티스트이다. 의사로서 어떤 명성과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신과 이론 일부를 차용하여 리더십이라는 정체불명의 학문을 만들어 강의하고 있는 사이비 학자 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나는 하이페츠의 팬이 아니거나 그를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수업과 당시의 경험은,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도 도저히 쉽게 잊을 수 없다. 아직도 가끔씩 생각이 나고, 생활이 바쁘지 않다면 언젠가 한 학기 수업을 처음부터 복기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보낸 메시지는 내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반드시 생각이 날 것 같다. ‘DO BETTER!’. 그는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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