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인턴십 – 뉴욕에서의 3개월
대학원 2년 과정의 중간 반환점과도 같은 것이 서머 인턴십이다. 나의 인턴십 자리 구하기는 꽤나 험난했다. 일단 지원해 놓은 워싱턴 DC/뉴욕 소재 국제기구들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유학 초기에 순진무구했던 나는 그런 모든 것에 네트워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구직 초반에는 아시아 소재의 한 회사 그리고 개발은행에서 기회가 있었다. 개발은행 인턴십 자리의 경우 그곳에서 근무 중인 학교 동문과 대화를 나눴고 분위기상 내가 신경 써서 지원서를 쓰면 잘 될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내와의 토론 이후 이 기회는 접기로 했다. 나는 지금껏 아시아권에서 일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온 이상 졸업 후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리잡기를 원했고, 아내 역시 그걸 원했다. 내 과거 경력이 모두 동아시아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여름 인턴부터라도 미국에서 해야 내가 서구권에서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면 맞는 결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돌아갈 수 있다면 어쩌면 아시아의 개발은행에 가서 좀 더 국제개발과 국제기구 자체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는 길을 선택했을 것 같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이후로 나는 아무 곳에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Dual Degree를 하는 친구에게 MBA 인턴쉽 리스트도 얻어 몇 군데 지원하고 면접까지 봤지만 내 손으로 모델링 테스트를 망쳐 탈락하고 말았다. 여름방학이 다가와 점점 초조해지던 차에 뉴욕 소재의 소규모 Environmental Finance회사에서 마침내 연락이 왔다. 무급인턴 자리 오퍼였다. 아니, 무급이라니...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뉴욕의 비싼 물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만 나에게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내의 개인 자금 지원과 적극적인 설득에 (사실 내 인턴십을 핑계로 뉴욕에서 여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우리는 뉴욕행을 결정했다.
막상 결정하고 나니 나도 살짝 설렜다. 20대에 친구와 온 미국 동부 여행 당시 나는 타임스퀘어의 엄청난 규모와 그 ‘도시스러움’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있다. 마치 ‘이것이 도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규모의 진정한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당시 여행에서 내게는 가장 좋았던 도시가 뉴욕이었기 때문에 (두 번째는 보스턴, 꼴찌는 워싱턴 DC였다. 당시 워싱턴은 20대의 끓어오르는 청춘에겐 너무 지루한 곳으로 보였다). 보스턴 집을 서블렛 놓고 뉴욕에 3개월간 머무를 집을 찾았다. 미드타운에 깔끔한 콘도 같은 곳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왕 3개월만 살 거 한국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좀 더 뉴요커스러운 집을 구하고 싶었다.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3층 건물의 한 스튜디오(원룸)를 얻었다. 스튜디오가 한 달에 3000불(그것도 급 서블렛이라 싸게 나온)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지만 동네와 집이 모두 아름다웠고 아내가 자기 돈을 쓰면서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경제적 스트레스는 잊고 3개월만 즐겁게 살아 보기로 했다.
여름 인턴으로서의 첫 출근은 설레는 경험이었다. 중국에서 영어로 일을 하기는 했지만 네이티브 스피커들로 이루어진 미국 회사에서 영어로 일해 보는 경험은 이때가 최초였기 때문이다. 미국에 온 이후로 많은 것이 처음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좀 더 떨렸다. 내 인생 최초의 미국에서의 직장 생활을 맨해튼에서 하게 되다니. 어퍼 웨스트사이드에서 소호로 출퇴근하는 나는 진정한 뉴요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떨리는 나의 첫 출근은 시작되었다. 소호 지역의 사무실들은 Broadway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찬 고건물들에 위치하고 있는데 밖에서 보기에 무척 매력적이지만 안은 비좁고 낡아 있다 (겉은 매력적이지만 안은 좁고 낡은 것은 우리가 렌트한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건물들을 지을 당시에는 미국인들의 체구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장실이나 세면대도 매우 비좁았다). 건물 내부가 목재로 되어 있어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등 내가 이때까지 경험해 본 오피스 환경과 많이 달라 재미있었다. Columbia와 NYU에서 온 두 명의 다른 인턴들, 그리고 5명 남짓 되는 회사 상주 직원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는 기후변화와 관련한 신사업을 준비 중이었는데 지분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해 재무 모델을 만들고자 했고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주 업무가 되었다. 업무 분위기는 여유 있는 편이었고 덕분에 미국에서의 첫 회사생활에 큰 무리 없이 서서히 적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3개월간 일을 하면서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직장생활 추억도 많이 쌓았다. 사장을 제외하고는 직원들 모두 30대 또는 20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점심에 각자의 식사를 사 와서 공동 식탁에 앉아 함께 먹었고, 가끔씩은 저녁에 환경 관련된 네트워크 모임에 가거나 직원들끼리 한잔 하러 가기도 했다. 점심으로 당시 유행하던 할랄 푸드 보울을 자주 사다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니면 당시 프로모션 중이던 앱을 깔아서 회사 주변의 무료 또는 할인 음식을 찾아 함께 돌아다니던 기억도 난다. 술자리는 두 번 정도 기억이 나는데 브루클린의 비어 홀, 그리고 회사 주변의 멕시칸 바에 갔었다. 술자리에서의 주된 토픽은 역시 사장 뒷담화였다. 사장이 직원들과 종종 크고 작은 트러블을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모두들 술자리에서 서로의 상황을 성토하고는 했고 사장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했다. 직장 생활이라는 것은 어디나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3개월 동안 뉴욕의 여름 생활은 즐거운 추억도 많이 선사했지만 사실 뉴욕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이제 나에게 뉴욕은 투머치다’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심어준 기간이기도 했다. 일단 내가 에너지와 호기심이 넘치는 20대가 아니라 체력도 달리는 데다 이미 놀만큼 놀아본 30대 중반이었다는 점이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고, 며칠 동안 여행자로서 지낸 것이 아니라 몇 달간 생활인으로서 살았다는 게 또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럽고, 좁고, 덥고, 지저분하고, 모든 것이 비싼 데다 정신없는 맨해튼은 나의 기본 스트레스 레벨을 올리고 삶의 질을 한 단계 이상 떨어뜨리는 곳이었다. 특히 여름 출근길에 에어컨 없이 푹푹 찌는 지하철 역사가 너무 싫었다. 게다가 트랙에는 쓰레기가 가득하고 (대체 왜 안 치우는 것일까. 옛날 뉴욕에 비해 많이 깨끗해진 거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정말 어땠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쥐약을 놓았다는 팻말 옆으로 쥐들이 뛰놀고 있으며 역사 천장에는 100년은 묵은 듯한 시커먼 먼지가 끼어 있는 Canal St. 역 같은 곳을 헤매다 보면 정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중간에 DC에 한번 다녀온 일이 있는데 20대 때에는 우울한 분위기라고만 생각했던 우중충한 지하철 역사가 뉴욕에 비해 너무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어서 좋게 느껴졌다). 게다가 타임 스퀘어라도 한번 지나치게 되면, 관광객 인파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 웬만하면 미드타운 근처에는 안 가고 싶어 졌다. 20대에 왔던 타임 스퀘어는 벅차오르는 꿈의 장소였는데 30대의 타임 스퀘어는 근처에도 가기 싫은 곳이 된 것이다. 사실 서울에서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명동에 잘 안 가게 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내가 엄청난 부자라면 맨해튼에서도 스트레스 안 받으며 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의 확실한 확률로) 여긴 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때까지 평생을 대부분 서울과 상해 같은 대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뉴욕의 바글바글함이 몸에 익숙할 만도 한데, 보스턴에 열 달 살았다고 이런 모든 것이 바로 투머치로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보스턴도 미국의 오래된 유명 도시이기는 하나 인구밀도라던가, 평소 생활공간의 크기 같은 것을 보면 뉴욕보다는 확실히 넉넉한 편이다. 조금 넓고 덜 붐비는 곳에서 좀 살았더니 몸이 금방 그런 생활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만약 내 몸이 뉴욕이 아닌 보스턴 정도의 적당한 도시스러움을 더 편안하게 여긴다면 나는 왜 평생을 빡빡한 대도시에서만 산 것일까 생각해 봤다. 한국에서는 서울이 아니면 내가 원하는 수준의 직업, 교육, 엔터테인먼트, 문화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제공하는 도시가 상해였고, 일본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라면 역시 수도/중심도시 정도일 것이며 다른 중소도시들은 아무래도 그와는 격차가 있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는 뉴욕에 금융, 패션 쪽 인재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살고 있지만 공공부문 인재들은 DC에 살고, 의료/교육 부문 인재들은 보스턴에 살고, 테크 쪽 인재들은 샌프란시스코 또는 시애틀에 살고, 방송/영화계 인재들은 LA에 사는데 다들 살만하고 좋은 도시들이기에 자연스럽게 나라의 인구도 분산되고 부도 분산되며 전체적인 삶의 질도 적정하게 유지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3개월은 훌쩍 지나, 나는 그렇게 살짝 질린 상태에서 뉴욕을 떠났다. 평화롭고 조용한 캠브리지로 돌아오니 몸과 마음이 다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시간이 조금 지나니 대도시의 자극이 그리워졌다. 캠브리지에는 자극적인 앙념과 부드러운 화이트소스가 조화롭게 뒤섞인 할랄 푸드 보울도 없고, 멕시코에서 방금 입국한 듯한 사람들이 만들어 주는 정통 멕시칸 타코 트럭도 없고, 인생 최고의 젤라토 집도 없고, 매 주말마다 할 거리를 만들어 주던 이벤트들도 없고, 밤 산책할 만한 거리도 눈부신 야경도 없었다. 지금도 뉴욕은 나에게는 좀 버거운 곳이지만 가끔은, 마치 담백하고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다가도 자극적인 음식에 대한 갈망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뉴욕이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