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재희 Jan 26. 2019

9. 한국에서 영어 잘한 Y 씨는 왜 망신을 당했나

내가 경제학 수업에서 잘린 이유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교육을 받고 자란 ‘토종'이지만 영어는 좋아했고, 그래서인지 평균보다 잘하는 편이었다. 대신 수학은 싫어했고, 그저 마지못해 따라가는 수준이었지만 문과생이어서 다행이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확실히 수학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인생에 더 쏠쏠하게 도움이 되었다. 유학을 오는 데에도 마찬가지였다. 비교 가능한 사람들 (한국인 및 동아시아 남성들)이 대부분 영어를 잘 못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돋보이는 면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예기치 못한 단점도 있다. 한국 토종으로서 나의 영어에는 분명 구멍이 있는데, 상대방이 얼핏 보기에는 언어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때 여파가 커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몇 단어들의 뉘앙스를 잘 모르고 사용하다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미국에 온 후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내가 사용한 어떤 표현을 상대방이 매우 불쾌해한 일이 있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고, 전혀 나쁜 의도가 없었는데 그것이 네이티브 스피커인 상대방에게는 꽤나 기분 나쁘게 들렸던 것이었다. “내가 사실은 영어에 서툴러서 잘 모르고 말을 했어요. 정말이에요.” 구차하게 해명하느라 힘들었지만 상대방은 내가 평소에는 말을 잘하다가 왜 갑자기 그런 표현을 썼는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또 하나의 예는 원어민에게는 당연한 단어나 표현을 내가 몰라서 생기는 실수이다. 내가 유학 초반에 겪었던 경제학 수업 수강 실패 에피소드가 바로 그 경우였다. 당시에는 아직 내가 가야 할 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거시경제 쪽으로도 관심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저명한 경제학 교수인 제프리 프랑켈의 고급 거시경제 수업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수업 제목이 시사하듯, 이 수업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 중에서도 이 쪽으로 특화된 전공의 학생들 (MPA-ID)이 우선 수강 대상이었고 그 외에는 교수와 면담을 해야 했다. 나는 학부 때 비전공이었지만 경제학 공부를 나름 했고, 투자 일을 할 때 매일 매크로 브리핑을 하면서 국제경제 현상에 대해 소위 ‘썰 푸는’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기 때문에 면담 신청을 했다.


면담 자리에서 교수는 처음부터 조금 회의적인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준비해 간 대로 왜 내가 이 수업을 들을 역량이 있는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하고 나자 교수가 내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오케이, 자네가 정 그렇다면 말을 그만 하고 간단한 테스트를 한번 해 보도록 하지" 나는 무언가 거시경제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케이스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는 종이에 뭔가를 한참 쓰더니 나에게 보여 주면서 말했다.


“Will you differentiate this?”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은 어떤 뜻 모를 수식이었다. 나는 일단 복잡한 수식을 보면 반사적으로 몸이 거부하고 뇌가 멈추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교수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Differentiate이라니... 뭘... 차별화하란 말인가?…(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A is different from B’ 밖에 없었다) 수식이 뜻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그걸 차별화하라니... 이 식을 의미가 같은 다른 수식으로 변환하라는 이야기인가?... 한참을 쩔쩔매다가 물었다. “이 수식을... 풀라는 이야기신가요?”


그랬더니 그는 “Yes! Differentiate it.”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수식이 뜻하는 바도 전혀 모르겠고, 뭘 어떻게 차별화하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죄송하지만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교수가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봐, 내가 지금까지 여기서 많은 학생들을 봐 왔지만 자네처럼 이 테스트에 손도 못 댄 사람은 처음이야! 아무리 못하는 학생들도 조금 건드리기라도 했다고. 자네, 한국에서 대학교 어디 나왔나?” (당시엔 몰랐는데, 이런 식의 질문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것을 보면 그는 유태인임이 분명하다)


나는 테스트도 못 푼 데다가 개인의 망신을 넘어 생각지도 않게 나의 모교까지 망신을 시킨 것 같아 머리가 멍해졌다. 다행히(?) 그는 이것을 학교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는 듯했다. “자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아무튼 내 수업은 들을 수가 없을 것 같네. 그만 나가 보게.”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상황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몇 초간 멍하니 앉아있다가 일어나야 했다.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연구실을 나와서 대체 differentiate이 무슨 뜻인가를 찾아봤다. ‘구분하다’, ‘차별화하다’는 뜻 맞는데... 아차, 수학용어로 ‘미분하다'라는 뜻이 있었네! 그렇다. 그 테스트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저 그 식을 미분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필요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문과생으로서 미분을 안 해본 지 백만 년이 되었지만 (그래서 단어의 뜻을 눈치로 때려 맞추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미분이라는 말만 알아들었다면 수학의 정석을 떠올리며 간단한 편미분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초중고를 한국에서 나와서, differentiate 이 미분한다는 의미로 쓰이는지 몰랐다. 토익, 토플, 교양영어, 군대 영어, 비즈니스 영어 어디에도 미분하는 내용은 안 나왔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교수로 하여금 중학교 수준의 미분도 못 하는 학생이 어쩌다 여기에 왔는지 혀를 끌끌 차게 만들어 주고 말았던 것이다. 다른 대화는 문제없이 잘했으니 교수도 내가 ‘미분'이라는 영어를 못 알아들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은 내가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되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탓이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로 경제학 쪽으로 진로를 한번 타볼까라는 생각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진로 결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시행착오를 줄였으니 어떻게 보면 이 경험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는 수 밖에).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어쩌면, 영어 대화 시 내 태도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때 이후로 나는 중요한 대화 중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냥 바로 물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명확하게 이해가 안 될 때에도 웬만하면 꼭 확인한다. 괜히 모르는 티 안 내려고 어설프게 넘어갔다가 일을 더 크게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생의 다른 상황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이든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뒤탈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