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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an 13. 2019

8. 하버드의 강의실

참여 점수와 다양성

한국도 그렇지만 HKS의 수업 분위기는 해당 수업의 특성과 교수의 성향 등에 따라 다 달랐다. 예컨대 정부 정책을 수학적인 툴로 분석하는 한 수업의 경우 학생들의 활발한 참여를 유도하는 수업 (학생들에게 clicker를 배부하고 수업 중 질문에 대한 답을 누르게 한다) 몇 차례를 한 후 그 내용에 이어지는 Problem set 과제 (조교들이 적극 참여하여 학생들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돕는다)로 이어지는 한 사이클이 한 학기에 세 차례 정도 반복되었다. 인프라금융 및 위험관리 수업에서는 1주에 한 번씩 케이스 스터디를 하고 3명으로 이루어진 팀별로 질문에 대한 결과를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그 외 교수가 게스트를 초청하여 대담하는 형식의 수업도 있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교수는 개입만 하는 수업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과거 한국 스타일로 그저 교수님이 앞에서 판서를 해 가며 한 시간 내내 강의 내용을 전달하는 수업 또한 있었다. ‘비즈니스와 정부’라는 수업을 맡은 노교수 (나야 잘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정치/행정부 경력이 화려한, 나름 인지도가 있는 분이었다)는 수업 시작 후 20분 정도 지나면 여지없이 과거 자신의 과거 무용담을 만담처럼 풀어내다가 수업을 끝내는 스타일이었다. 미국식 아저씨 토크도 가끔 나왔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예일대학교를 까대는 내용이었다. 한참을 킥킥거리며 까대고 난 후 “그래도 예일 같은 라이벌이 있어서 우리가 탑 스쿨로 함께 발전할 수 있었지 안 그래?....ㅋㅋ 오케이 프린스턴도 끼워주지 뭐” 같은 식이었는데, 강의실에 나를 포함해 외국 학부를 나온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잘 안 먹혔다. 뭔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면서 아저씨 토크는 국적을 초월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스타일은 달라도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한다는 것이었다. 참여 점수라는 것이 있어서 수업 중 학생들의 발언 회수를 체크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가만히 앉아 멍 때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다소 짜증 나는 부작용이 있었다. 주로 미국 학생들인데, 아주 기초적인 질문이나 별 내용이 없이 그저 말을 하기 위한 말 또는 다른 학생들에게 크게 도움되지 않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늘어놓아 수업의 흐름을 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와 한국 유학생 후배는 ‘쟤 뭐 하는 거니?’라는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국적의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샘플의 양이 충분치는 않으나 대략적인 결론은 과한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미국 스타일에 가깝고 유럽 출신들을 포함한 다수의 다른 국가 출신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업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으면 발언을 자제하는 편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참여점수 방식의 비효율적인 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적어도 석사과정 수업에서는 강의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교수의 깊이 있는 지식과 학우들의 정리되고 예리한 질문에서 나오는 통찰을 배우고 싶은데, 누군가가 저런 식으로 우리 모두의 시간을 낭비하면서 참여점수도 더 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미국 스타일의 장점도 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단 아무리 기본적이거나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이라도 최소한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내용의 재확인이라는 기능이 있고, 많은 경우 질문과 답변의 과정에서 무언가 새로운 내용이나 맥락을 파악하게 된다. 또한 나처럼 집중력 구간이 짧은 사람에게는 뭐라도 발언하기 위해 생각하고 있거나 남의 질문을 듣고 생각하다 보면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더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문자 개인의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질문을 생각해서 자주 던지다 보면 위축되지 않고 어느 순간 하나씩 멋진 질문이 얻어걸리기도 한다. 주목도 받고 참여 점수도 챙길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전략인 것이다. 


미국의 강의실 풍경 중 내게 가장 낯설었던 것은 바로 무지개 스티커였다. 모든 학생들은 자신의 이름표를 앞에 놓고 수업을 듣는데 (그래야 교수가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질문을 던질 수가 있다) 무지개 스티커를 자신의 이름표에 붙여놓은 학생들이 꽤 많았다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열 명 중 한 명, 때로는 그 이상) 지금은 한국에도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과 상징물 등이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불과 몇 년 전인 당시의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고 그저 자기 이름표를 꾸미기 좋아하는 친구들인가 보다 했다. 그 의미를 알고 나서는 먼저 그 수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그러한 성향을 굳이 공공연하게 미리 선포(?)하는 행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데 저렇게 내세우고 다닐 필요가 있나 했는데, 생각해 보면 타인이 그들의 성향을 미리 알고 있으면 아무래도 대화나 생활중에 불편해질 상황을 미리 방지할 수 있고 좀 더 배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더 당당하게 존중받을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액티비스트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교내에서는 동성애자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 그룹들의 존중받을 권리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학생들 간의 토론이 많이 이루어지는 수업의 경우 강의실 안에서, 그리고 강의실 밖에서는 포럼 (HKS 건물 중앙에는 포럼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주로 외부 인사 초청 강연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평소에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이 주 공간이었다. Black lives matter 캠페인을 필두로 한 흑인 차별 금지 운동, 여성에 대한 사회적 장벽을 깨고자 하는 여학우들의 목소리,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극복하고자 하는 아시안들의 목소리,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중지하자는 호소 등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하버드가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이기도 하고, HKS라는 학교의 특성상 이러한 토론이 더 자주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각 소수 진영을 대표하는 학생들이 열변을 토할 때마다 이중 어떠한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주류, 바로 ‘Tall white male’들은 딱히 할 말이 없이 수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역차별에 대한 우려를 은연중에 드러낼 뿐이었다 (Tall white male이라는 표현은 한 수업 중에 나왔는데, 왜 tall이 여기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흥미로웠다. 미국에서도 남자는 역시 키가 커야 하는가 보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우려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었고 결혼 이후에는 아내와의 연대감 때문인지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타 마이너리티 그룹의 주장에는 쉽게 공감하기 힘들었다. 논리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강한 주장에 대한 즉각적인 뇌의 1차적 반응은 ‘글쎄… 이미 당신들 충분히 권리 보장받고 있는데 좀 요구가 과한 거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백인 남성들의 입장에 더 공감이 간 것이다. 처음에는 내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에서 분명 소수 그룹에 속해 있는데 왜 소수 그룹들보다 백인 남성들에게 더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내가 찾은 대답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인종, 다양성 문제의 스케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바로 내가 백인 남성 같은 위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비슷한 위치인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소수 그룹의 주장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결국 나와 다른 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내가 직접 그들의 입장이 되거나 그들과 감정적으로 연대할 만한 계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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