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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an 13. 2019

17. 일의 속도와 스타일

나는 나에게 맞는 속도와 스타일을 찾아왔을까

국제기구/개발은행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가장 큰 충격 중의 하나는 일의 속도였다. 아시아의 프라이빗 섹터에서 일하다 온 나에게 퍼블릭 섹터 일을 하는 이 곳(각국 정부 또는 정부기관에게 개발을 위한 장기 자금을 저리로 대여하는 업무를 한다)의 업무 속도와 스타일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간단한 회의 한 번이면 일이 금방 진행될 텐데 모두들 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1주고 2주고 기다리는 모습, 한 가지 내용의 clearance를 위해 여러 사람의 검토를 거치며 며칠씩 시간이 지체되는 모습, 그리고 보고서의 문구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검토를 수십 번도 더 하는 관료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금융투자업계의 삭막함이 싫었고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이 곳에 왔는데 이렇게 일이 처리되는 속도나 스타일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과연 맞는 곳에 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한 TTL과 잠시 교착상태에 빠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내가 “그럼 이쪽이 멈춰 있는 동안 다음 단계인 이걸 미리 준비해 놓을까요? 아니면 제가 다시 한번 연락해 볼까요?”라고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자 나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네가 프라이빗 섹터 출신이라 일을 직선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건 알겠네. 하나 끝나면 다음 단계 또 그다음 단계로 계속 나아가고 싶겠지. 하지만 이 곳에서의 일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럼 이 곳에서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양 손바닥을 내 쪽을 향해 미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 곳에서는 이렇게 하나 밀고, 그다음 옆에 가서 하나 밀고, 또 옆에 가서 하나 밀고… 이렇게 모든 블록을 다 하나씩 밀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어.” 당시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왜 일을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이해가 잘 되지 않고 나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좀 더 기구에서 경험이 쌓인 지금은 처음보다는 훨씬 자세한 그림을 보게 되었고 회사의 문화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일단 프라이빗 섹터는 목표가 단순하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고 다른 목표는 부수적이다. 주인(주주 집단)의 이익이라는 목표를 향해 주인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면 되는 구조이다. 주요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 효율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이다. 또한 플레이어나 상대방 모두가 같은 어젠다(이익의 극대화)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화가 통하고 협상이 접점을 찾기가 용이하다. 이런 업무환경에서의 일은 깊은 고민 또는 서로 다른 시각의 접점을 찾는 일보다는 빠른 판단과 빠른 일 처리가 중요하다.


이에 반해 퍼블릭 섹터는 훨씬 복잡하다. 일단 주인은 국민/시민이겠지만 ‘국민의 뜻’은 이랬다 저랬다 한다. 국민을 대표해서 방향을 결정하는 정권이 정치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 불안정한 일부 개도국의 경우, 나라의 방향 자체를 잡을 수가 없어 아무 일도 진전될 수가 없다) 그리고 주인의 목표도 단순하지 않다. 경제 발전이 표면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환경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리고 개발 때문에 소외되거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사회계층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이들 중 경제발전이 더 우선시 된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컨대 발전소 건설이 환경적, 사회적 비용이 크다면 경제적 효과가 크더라도 진행될 수 없다. 게다가 경제 발전 자체도 효율성뿐 아니라 형평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직선적으로 나아갈 수 없고 모두가 동의해야만 나아갈 수 있는 구조이다. 주요 고민은 어떻게 하면 서로 간의 의견 차이를 극복하고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이다. 또한 플레이어나 상대방이 모두 다른 어젠다를 가진 (저마다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화가 통하지 않고 협상이 평행선을 달리기 쉽다. 이런 업무환경에서의 일은 깊은 고민과 서로 다른 시각의 접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며 빠른 판단, 빠른 일 처리보다는 바른 판단과 바른 일 처리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퍼블릭 섹터에서의 일은 프라이빗 섹터와 같이 일이 착 착 진행되는 맛은 없다. 나처럼 성격이 급한 편이고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프라이빗 섹터의 일이 더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퍼블릭 섹터의 일은 좀 더 도전적이고 복잡한 퍼즐 같은 면이 있다. 변수가 많은 만큼 좀 더 복잡한 사고와 능력을 요구하니 마치 내게 발달하지 않은 뇌 근육을 키워주는 느낌이고 종합적 인간으로서 좀 더 발전하는 느낌이 들어 좋기도 하다. 기구에 처음 온 이후 한동안은 이 곳이 내게 맞는 곳인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졌고 위의 두 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오가며 고민했다.


Fast forward 해서 현재의 나는 기구 내에서 직접 개도국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아닌 기구 자체의 재무, 전략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팀은 목표와 방향이 명확하고 업무 스타일도 프라이빗 섹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시에 기구의 목표 중 하나인 국제 공공재의 보급 (기후변화, 난민 문제 등의 개선)을 위해 기구의 재원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와 같은 고민도 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일에서 바라던 것과 내 개인 스타일의 접점을 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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