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재희 Nov 02. 2018

18. 프랑스인, 인도인, 한국인

세 국가 출신의 직장 상사 및 동료들에 대한 단상

내가 지금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만난 첫 번째 상사는 내 모든 직장 생활을 통틀어 만난 상사들 중 가장 악랄한 성격 파탄자였는데 (이 사람의 국적은 밝히지 않기로 하겠다) 다행히 팀 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일을 제안하여 오래지 않아 그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의 새로운 보스가 된 이는 프랑스인이었는데 일단 악마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에 처음엔 안도하였으나 곧 다른 종류의 답답함이 생겼다.


이 사람은 나에게 일을 시켜놓고 급하지 않으면 그 일의 관리감독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주어진 일을 하고 나서 그다음 단계를 물어보면 미안하다면서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을 먼저 마친 후 오후에 또는 내일 아침에 보고 피드백을 주겠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는 한 이틀 정도 연락이 없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면 또 친절하게 맞아 준다. 그리고는 자기가 다른 일로 바빠 시간이 없어 못 봤으니 (그 정도로 바빠 보이지는 않는데) 다시 이번 주 말까지 피드백을 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나는 중간중간에 혼자 다시 검토해 보거나 하기는 했으나 엄밀히는 일주일을 그냥 날린 셈이 된다. 그러면 또 친절하게 나의 대기 시간에 대한 급여는 챙겨 주었다. 아시아의 프라이빗 섹터에서 일하다 온 나로서는 아무리 눈먼 돈으로 일하는 퍼블릭 섹터라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고용해 놓고 단물을 쪽쪽 빨아먹기는커녕 관리도 대충 하면서 아무런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게다가 이 사람은 출장이라도 가면 출장 관련 업무를 보느라 나의 어떠한 연락도 받지 않았다. 물론 나로부터의 연락은 이 사람의 우선순위 중 최하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말을 하진 않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업무량만을 수행하며 다른 사람이 기다리던 말던 (내 밥그릇을 쥐고 있지 않는 한) 내 업무 외 시간은 절대 침해될 수 없다’라는 생각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는 듯 보였다.


이후에 만난 프랑스인들 중에는 야망에 찬 젊은 엘리트, 일 잘하고 인정받는 간부, 윗분과 동료의 총애를 받는 능력자 등 훨씬 부지런하고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위에 언급한 기본적인 느낌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그들의 오랜 투쟁의 결과물로 높이 평가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내가 그 상대방이 되면 뜨악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프랑스인들의 영향을 받은 서 아프리카인들도 더했으면 더했지 다르지 않다. 한 번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데 아프리카인 동료가 확인을 해 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메일을 1차로 ‘씹히고’ 나서 2주 차에 다시 보냈더니 출장 중이라는 자동 이메일이 왔다. 다시 1주일을 기다린 후 다시 정중하게 메일을 썼다. ‘이러이러하여 제가 일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확인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거의 한 달이 되어서야 연락을 받고 일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약 2-3주 후에 내 상사에게 피드백이 왔는데, 그쪽에서 내가 너무 지나치게 압박하는 것 같다고 살짝 클레임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 나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 다음에 만난 상사는 인도인이었다. 인도는 정말 복잡 다양한 나라이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특유의 어그레시브 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인구밀도가 매우 높고 경제적으로 아직은 저개발국가인 인도에서 살아남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의 상사는 비교적 젠틀한 분이었다. 젠틀한 것과는 별개로, 업무 스타일은 이전 프랑스인 상사와는 180도 달랐다. 일단 이 분은 아침잠이 없으시고 근면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근검절약의 태도나 기타 몇 가지 말투에서 새마을 운동 시대의 한국 아버지 세대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모든 이메일에 총알 답변을 하는 스타일이었고 그것은 업무시간 업무 외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비슷한 맥락으로 업무 외 시간에도 자주 메일을 뿌렸다. 물론 답은 아침에 해도 된다고 인자하게 이야기하시지만 본인이 업무 외 시간에도 그렇게 온라인 상태이니 내가 정말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성질이 나보다도 급하신 분이라 메일에 답이 바로 안 오면 전화/문자로 재확인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점은 프라이빗 섹터, 그리고 한국 같은 곳에서는 일을 깔끔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높게 평가받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곳에서는, 특히 유럽 사람들에게는 너무 유난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3주간 세 번 확인 메일을 보낸 나 보고도 압박한다고 하니 당연하다). 이러다 보니 같이 일하는 독일인이 제발 이렇게 저녁에 바로바로 답장하지 말라고 무섭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반은 농담조이긴 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진심이 많이 묻어났다. ‘Get a life please’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인도인이 회사에 워낙 많다 보니 내 직속 상사 이외에도 그 위의 매니저나 아예 다른 팀의 인도인 상사들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내 상사와 같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권위적이라는 것이다. 전에 어떤 계약직 직원이 인도인 매니저에게 급여 네고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 매니저는 비용에 민감한 편이고 네고를 받아 주지 않기로 유명하다고 조언을 들었지만 그는 말이라도 해 보겠다며 강행했다. 미국에서 급여 네고는 당연한 것 아닌가... 아예 황당한 금액을 부른 것도 아니고 그냥 제시된 금액보다 10% 미만의 인상을 고려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이었다. (제시된 금액은 실무자가 정한 것이고 매니저는 그 금액에 대해 몰랐다). 물론 메일 내용도 매우 무난했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평소에 바쁜 일 아니면 답장도 잘 하지 않는 매니저에게 답장이 왔다. ‘이러이러하여 이 사람의 경력을 검토해 보았는데, 제시된 금액보다 20% 적은 금액이 이 사람의 경력에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메시지 끝)’. 답장을 받은 당사자는 충격에 허둥대고 옆에서 보는 나는 서늘함을 느꼈다. 모든 사무적인 표현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개기면 죽는다’는 메시지만 확실히 뇌리에 박혔다. 그 직원은 결국 원래 금액보다 10% 낮은 금액에 계약했다.


권위적인 인도인 상사에 대한 이야기라면 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스페인인 여자 동창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의 첫 인도인 상사가 자신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시켰다며 울분/황당함을 토로했다. 사실 미국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매우 신선했다. 인도인 아재 상사가 유럽 신입 여직원에게 ‘커피나 한잔 타 오지’라고 하는 그림이라니... 본국에 신분제가 공고하고 자신이 높은 신분이어서 그런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긴, 신분제가 없는 한국에서도 여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시키는 일이 어색해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딱히 할 말은 없는지도 모른다.


일 하는 스타일/속도에서 권위적인 조직문화로 이야기로 흘렀는데 그러면 같은 주제를 가지고 프랑스인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한다. 사실 인도인 마피아, 프랑스인 마피아는 우리 조직에서 유명하다. 그들끼리 뭉치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며 조직을 장악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간혹 한국인 마피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한국인들은 자주 몰려다니기는 하나 조직에서 숫자와 영향력이 아직 미미하고, 정보는 공유하되 프랑스, 인도인들처럼 대놓고 노골적으로 누굴 밀어주거나 하는 행동은 꺼리기 때문에 그들과 비교하기 힘들다) 전에 함께 일하던 프랑스인 상사도 팀 안에 자기가 확실히 믿고 키워주는 프랑스인 직원이 있었다. 매니저 앞에서 프로젝트 관련 발표를 하는데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내가 다 만들었고 영어 프레젠테이션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복인 프랑스인 직원에게 발표를 맡기려고 하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다행히 그 직원이 양심은 있어서 발표는 내가 하게 됐다) 그런데 팀 내부 회의 중에 그 직원이 해당 상사의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박하고 심지어 말을 여러 번 자르고 들어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나도 상사에게 할 말을 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상사들에게 총애를 받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 친구는 내가 봐도 좀 그렇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자기를 강력히 밀어주는 상사의 말을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상사의 강력한 서포트를 받고 있고 그들의 관계는 끈끈하다 (물론 다른 프랑스인들은 이 친구보다는 훨씬 덜 직선적으로, 표현에 매우 신경 써 가면서 말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할 말을 안 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자신의 직속 라인 선배임에도 비판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하용되는 것이다.


이들과 비교하면 한국인의 이미지는 어떨까. 일단 근면 성실하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잘 하는 것으로는 잘 알려져 있다. 동시에 자기 의견 주장이 그리 강하지 않고 고분고분하다는 이미지도 있어서 뭔가 힘들지만 귀찮은 일을 맡기고 싶을 때 꼭 집어서 한국인 중 이런 일을 할만한 사람 없느냐고 내게 묻는 동료도 있었다.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성격 파탄자도 주로 한국인, 중국인 등 동아시아인들과 일해 왔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그런 성격을 받아주고 그나마 길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나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상당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한국인을 위에 언급한 두 국가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인도인들보다는 덜 권위적이지만 프랑스인들보다는 권위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두 국가 사람들보다 군말 없이, 때로는 더 열심히 일하지만 일반적으로 자기주장이나 의견 피력은 약한 편이다. 그리고 자국인들끼리 자주 만나고 몰려다니는 경향은 유사하지만 조직에서의 세력 형성이나 자국인들 네트워크 확장 면에서는 두 국가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덜 적극적인데, 기본적으로 다른 국가 사람들의 시선이나 시스템의 공정성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는 대놓고 누군가를 밀어주거나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 나올 뒷말을 부담스러워하고 듣기 싫어하니까 말이다. 위의 두 국가 사람들은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회사의 직원들이 대부분 자국에서 성장한 후 커리어 중간에 미국에 온 경우가 많아 자국의 색깔을 유지하다 보니, 모두들 특정 국가 출신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고 이것이 각자를 바라보는 데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한 프랑스 상사는 내가 윗사람 누구를 컨택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한국식으로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고, 그냥 가서 과감하게 물어봐'라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깍듯이 예의 차리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여기서도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가 보기에 나는 그냥 그런 한국인이었던 것 같다. 역으로 우리 팀의 프랑스인 동료는 아시아계 동료들로부터 자기표현이 강하다는 피드백을 받자 너무너무 억울해하며 자기가 오해를 받고 있다고 했다. 어떤 심정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내가 봐도 프랑스인 남성 중에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데다 말도 돌려서 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아시아인 평균에 비하면 그 정도만 해도 자기표현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사람들의 인식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저 나에게 씌워진 한국인의 긍정적인 이미지(일 열심히 하고 같이 일하기에 까다롭지 않은)를 배신하지 않으면서 흔히 약점으로 생각되는 이미지(커뮤니케이션에 약하고 자기 주관이나 리더십이 뚜렷하지 않은)를 극복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 18화 17. 일의 속도와 스타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