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못된 것 같이 보이다가도 결국은 순응하게 되는 국제개발의 현실
내 직장에서는 출장을 미션(mission)이라고 부른다. 단순한 Business trip이 아닌, 뭔가 사명감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간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워싱턴 DC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개도국들로 날아가려면 항공권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항공사들이 자주 취항하는 곳들이 아닌 데다 회사 지침상 총 6시간 (확실치 않다) 이상이면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콩고 민주공화국 수도인 Kinshasa까지 가는 왕복 항공권은 약 6500불, 원화로 700만 원 이상이었다. 심지어 출장 날짜가 확정되지 않아 마지막까지 일정 변경을 하게 되면 10000불 가까이 나오기도 한다. 보통 미션을 가면 한 팀의 최소 3-4명이 함께 가는데 호텔 비용까지 계산하면 이들이 2주일 출장을 다녀오는데 3-4만 불이 든다. 콩고 민주공화국은 국민소득이 1인당 450달러, 그러니까 국민 한 명이 하루에 1불 조금 넘게 버는 국가다. 이런 국가들이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 발전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MDB의 목적인데, 그 나라 사람 3만 명 넘는 사람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을 직원들 4명이서 출장 다녀오는 데 써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을 보고 ‘과연 예산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 것일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퍼블릭 섹터는 자기 돈 아니라고 정말 막 쓰는구나 (MDB는 각국 정부가 낸 자본금을 바탕으로 시장에서 자금을 저리로 차입하여 운영되는데, 각국 정부가 낸 자본금은 결국 세계인 모두의 세금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나는 컨설턴트였는데,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젊은 컨설턴트의 급여 (세후)는 월급으로 환산하면 보통 저 항공권 가격보다 훨씬 적은 수준이다. ‘저 항공권 가격으로 차라리 젊은 컨설턴트 하나를 한 달 동안 쓰면서 현지 인력들과 영상통화하도록 하면 출장 2주 (오가는 시간과 주말을 제외하면, 사실 일하는 시간은 7-8일 정도) 다녀오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같이 일하게 된 인도인 상사의 철학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분은 출장 시 항상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하여 프로젝트 비용을 절감하고 그 자금을 좀 더 해당 개도국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려고 했다. ‘여기에 생각 제대로 박힌 분은 이 분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몇 달이 지나고, 이곳에서의 경력이 조금씩 쌓여 가면서 나도 이곳저곳 출장을 다니게 되었다. 앉아 있는 위치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일단 출장을 다녀오면 왜 굳이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 왜 안락한 DC 사무실에 앉아 이러쿵저러쿵해서는 프로젝트 진행이 안 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출장을 가 봐야 비로소 현지 국가의 문제와 현황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Energy Access라는 말을 내가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와 닿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의 대도시, 미국에서만 살아온 나는 전기에너지에 대한 접근이 부족한 세상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현지에서 실제로 가게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비싼 경유를 사서 소형 발전기를 돌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고, 오피스 빌딩에 들어오는 전기가 자주 끊기고 하는 것을 겪어 보면 왜 이 나라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이런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는지 맥락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 저개발 국가의 정부와 함께 일해야 하는 직무의 특성상 현지에 가서 얼굴을 들이밀지 않으면 일이 잘 안 된다. 저개발국은 한국처럼 담당자에게 이메일 딱 보내면 하루 안으로 정성스러운 답장이 오는 곳이 전혀 아니다. 정부 관료들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면 보통 답장이 오는 데 일주일 이상 걸리는데, 그것도 뭔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추가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면 다시 연결이 잘 안 되고 다시 1주일이 낭비된다. 그렇다고 스토커처럼 전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쪽도 여름 7-8월에는 휴가철이고 11월 말부터 1월 초까지는 연말 분위기여서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 달은 2-5월, 9-11월 정도인데 이렇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다 보면 1년간 정말 아무런 일도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의 프라이빗 섹터 출신인 나에게는, 이런 상황이 정말 황당할 정도로 답답했다). 직접 가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아 놓고 현지에 날아가서 얼굴을 들이 밀면 그제야 그쪽 사람들도 움직인다. ‘그래도 뭔가 해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군'이라고 생각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확실히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면 이메일이나 전화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제야 협조도 좀 해 주는 등 그동안 답답하게 풀리지 않던 여러 가지 일들이 술술 풀린다. 우리 팀원들도 돌아가면 미션에서 뭘 하고 왔다고 자세히 보고를 해야 하고, 돌아가면 다시 제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현지에서 많은 일을 진행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미션에서 돌아오면 일단 얼굴 한 번 보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 사이기 때문에 똑같이 전화를 하더라도 소통이 훨씬 잘 된다.
그래서 미션은 가야 한다. 그렇다면 꼭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야 하는가? 일단 비즈니스 클래스의 달콤함은 한 번 맛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누워 잘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제공하는 안락한 좌석, '나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하러 이렇게 오지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야’라는 기분을 내내 지속시켜 주는 우월한 서비스, 맛있는 식사와 음료, 차곡차곡 쌓이는 내 마일리지 등. 하지만 허영과 부수적 이익이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야 하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다. 아프리카 출장은 경유 대기를 제외하고 비행시간만 총 18시간, 오세아니아 비행은 24시간이 될 정도로 고된 여정이다.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가도 시차와 수면 부족으로 몸에 타격이 오고, 현지 도착 및 귀국 후 이틀간은 정신 차리고 일 하기가 힘든데 이걸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고 가라면 아무리 사명감이 넘쳐도 노 땡큐다. 출장이 딱 한 번도 아니고 바쁜 시즌에는 한 달에 두세 번씩 다닐 때도 있다. 내가 스물한 살 배낭여행족도 아니고, 가서 성과를 내기 위해 압박 속에 일하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인데 18시간, 24시간씩 이코노미를 타고 대륙을 왕복하는 생활을 하다가는 조만간 쓰러져 산재처리받아야 할 상황이 가까워질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고위직이 아닐 경우 비즈니스 여행도 이코노미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저 정도의 빈번한 장거리는 아니겠지만, 그만큼 출장을 가는 실무급 직원들의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다. 게다가 동행하는 고위직께서 편안하신지도 신경써야 하지 않는가). 평균적으로 조직에 순응하는 성향인 아시아인도 이렇게 느끼는데 노동조건에 대한 심리적 기준이 더 높은 미국이나 유럽 출신 직원들더러 이코노미를 타고 장거리 미션에 가라면 아마 내부 고발 절차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물론 비교 가능한 미국 내 회사들의 지침과 비교하여 형평성이라는 문제 역시 제기될 것이다. 매니지먼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런 개도국들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규모가 몇 십억 단위임을 고려할 때 여행경비는 그리 큰 부분이 아니기도 하다. 여행 경비를 손 보기보다는 일은 많이 안 하고 연봉은 많이 받아가는, 근무연한이 오래된 저성과자들 일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돌릴지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고, 실제로 이쪽 분위기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오퍼레이션의 현실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자, 자진해서 이코노미 클래스로 장기 비행을 하는 상사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멋지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출장은 가급적 같이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구가 좀 작으신 편이라 본인은 불편을 덜 느끼시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사람이 생활수준이 한 번 올라가면 다시 내리기는 힘들다. 개인과 가정생활에 대한 권리 존중이 확실한 선진국 출신 사람들과 중진국 출신으로 선진국의 맛을 본 나 같은 사람들, 그리고 개도국 출신이지만 아마도 자국 내 최고 수준의 엘리트 계층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곳에서 직원들의 생활수준을 내리면서 그 자금으로 개도국을 더 돕자고 하면 먹힐 리가 없고 그것이 올바른 방향인지도 의문이다. 그럼 국제 개발은행의 모든 인력을 저임금으로 열심히 일할 의향이 있는 개도국 국민으로 싹 바꾸고 개도국 현지 사무소 중심으로 모든 일을 돌아가게 하면 어떨까. 그러면 현지 사무소의 관리/감독이 중요해질 텐데 파견을 늘리면 인건비가 더 높아질 수 있고 (본부 직원을 개도국에 파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위험수당, 거주비, 교육 지원비 등 해당 직원의 연봉보다 훨씬 크다) 파견을 줄이면 관리감독이 제대로 안 될 가능성이 높으며 현지 사무소의 이권이나 부패 개입의 위험성이 커질 수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안 된다 (나를 포함한 많은 국제기구 직원들의 진심이자 주요 국제기구에서 자국 출신 직원의 비율과 영향력을 유지/확장하고자 하는 정부들의 진심이기도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변화는 쉽지 않다. 특히나 국제기구처럼 조직이 크고 직원도 많으며 다양한 국가 출신인 데다 조직의 목표도 민간 기업처럼 단순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많은 경우에 그러하듯, 밖에서 뭔가를 바라보면서 비판하고 해법을 제시하기는 쉬워도 안에 들어와서 실상을 잘 아는 내부자가 되면 문제는 더 복잡하고 모든 일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온다. 출장 관련 규정도 점차 엄격해지고 (항공권 구매 시, 최저 가격이라는 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시스템에서 구매 자체가 되지 않고, 카드 마일리지를 회사가 먹기 위해 새로운 법인카드를 출시했으며, 직원 복지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삭감되었다) 일부 조직에서는 그동안 국제기구에서 금기시되던 대규모 구조조정과 희망퇴직을 시행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모든 정보가 투명해진 시대에서는 조직의 효율성에 대한 요구가 안팎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국가들도 각자 빡빡한 예산에 시달리는 만큼 우리에게도 적은 돈으로 (제한된 자본금 지원 및 ODA 자금 지원) 최대의 효과를 (양적, 질적으로 개도국 지원의 성과를) 요구하고 그걸 더 자주 보고하도록 요구한다.
결국 국제기구 신입으로서 많은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안고 시작한 나는 점점 이쪽의 일하는 방식이 몸에 맞아 가기 시작하면서 날이 무뎌지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점점 ‘내부자’가 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언제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정신적 육체적 부지런함을 유지해야 하고 변화와 발전의 흐름을 읽으며 그에 대응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 나는 변화와 경쟁의 격전지인 한국 사회에서의 고 스트레스 환경이 항상 싫었는데, 역설적으로 그런 한국 사회에서 젊은 시절 하드 트레이닝된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들 때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