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시티, 셰프 레스토랑,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멕시코 시티에서 만난 로컬 타코
보스턴의 추운 겨울에 정신적으로 지쳐 가던 무렵, 친구가 멕시코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에 혹해서 찾아보다 가격이 가장 저렴한 비행기표 중 하나인 멕시코 시티행 티켓이 눈에 들어왔고 정신을 차려 보니 구매를 확정한 상태였다. 이렇게 급 3박 4일 멕시코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멕시코 여행이었다. 밝고 따뜻한 햇살에 취해 기분이 좋아졌고 멕시코 현지의 타코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때 나는 멕시코 현지 타코에 매우 실망했다. 현지의 시장 골목 같은 곳에서 현지인들이 많이들 앉아 있던 타코 집이 나의 첫 경험이었는데, 일단 비주얼부터 딱히 식욕을 돋우지 않았다.
몇 가지 종류의 양념에 절여진 고기들이 들어있는 컨테이너에서 재료를 퍼서 토티야 위에 얹어주고는 끝. 토마토도, 께소도, 양파나 실랜트로도 없이 그냥 그게 끝이었다. 그 재료마저 양이 많이 않았고 맛도 뭐 그닥이었다. 가격이 너무 싸서 그런가… 맛이 있든 없든 재료 하나는 아낌없이 때려 넣는 미국 식당들에 익숙해져서인지 좀 서운했다. 이 광경을 보고 생각한 것은 국가의 경제 수준이 서민음식의 수준에 영향을 주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중국에서도 동네의 서민음식점에서 고기 탕면을 먹으면 면과 국물이 95%에 고기는 눈곱만큼 얹어 준다. 서민들이 자주 찾을 수 있는 가격대의 음식에는 고기를 비롯해 값나가는 재료를 마음껏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국도 예전에는 보통 식당에서 설렁탕을 먹으면 얇은 소고기가 그저 몇 장 들어가 있어서 밥과 국물로만 배를 채우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식당의 설렁탕에도 만족스러울 만큼의 고기가 들어있다. 음식문화가 발달하려면 역시 국가경제와 중산층이 어느 정도 발전을 해 주어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멕시코를 몇 번 더 가면서 맛있는 타코를 많이 먹어 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멕시코 타코에 대한 내 첫인상에 몇 가지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내가 갔던 타코 집은 그저 맛없게 하는 집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마치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먹으러 왔는데 인정받은 맛집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눈에 처음 보인 백반집에 들어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한국에도 맛이 없어 골목식당 솔루션을 받아야 될 것 같은 식당 천지인 것처럼, 멕시코도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다. 둘째, 멕시코 현지 스타일은 실제로 토티야에 메인 재료만 얹어서 서빙하는 것이었다. 그 위에 하는 토핑은 각자 알아서 토핑 바에 가서 취향대로 더하는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 설렁탕 서빙할 때 멀건 국물만 주고 거기에 파, 소금 후추 깍두기 등은 알아서 챙겨야 하는 것과 같다. 미국에서는 단지 일반 대중의 편의를 위해 토핑을 다 만들어 얹어 주는 것이었다.
나의 첫 멕시코 여행에서는 타코에 실망했지만 오히려 다른 멕시코 음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길거리 음식으로는 Huarache나 Sopes, 그리고 멕시코의 전형적인 아침식사인 Huevos Rancheros 가 인상적이었다.
찰스턴, 셰프의 타코
미국에 돌아온 이후, 나는 타코를 멕시칸 스타일로 만들되 재료와 만듦새에도 신경을 쓰는 타께리아를 미국에서 계속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유명 셰프들이 점점 타코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추세였다. 즐겨보는 TV 음식 프로그램에 이끌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서 훌쩍 다녀올 만한 몇 안 되는 관광지 중 하나인 찰스턴에 방문하게 되었다. 현지 우버 기사의 말에 따르면 찰스턴은 “Foodie capital of the East Coast”라고 불릴 정도로 맛집들이 많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젊은 셰프들이 많이 찾아와서 가게를 오픈해서인지, 대부분의 음식점들이 훌륭한 수준이었다. 바비큐나 후라이드 치킨, Shrimp & Grits 미국 남부 특유의 메뉴들 뿐 아니라 다른 맛있는 메뉴들도 많았다.
굳이 이곳에서까지 타코를 찾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데, TV에서 본 셀레브리티 셰프가 자신의 메인 레스토랑 외에 타코 집도 하나 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생겼다. 찰스턴에서 3일 동안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는데, 의외로 첫 찰스턴 여행 이후 가장 많이 생각났던 음식은 다름 아닌 이 집의 타코였다.
특히 Carnitas 타코가 예술이었다. 사실 Carnitas 타코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데 (같은 돼지고기라면 Al Pastor를 더 선호) 이 집의 Carnitas는 고기에다가 양념에 잘 절인 바삭/촉촉한 Chicharron (돼지껍데기)를 함께 얹어주어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순간 이쯤 되면 반칙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건 멕시코 정통 Carnitas가 아니잖아. 셰프들이 맛난 재료와 비장의 기술을 가지고 타코를 만들기 시작하면 이건 길거리 음식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타코라고 할 수 있나. 아주 잠시 이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은 맛있으니 (가격도 많이 비싸지 않았다)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South Philly
음식을 좋아하다 보니 음식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도 곧잘 보는 편인데 Chef’s Table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한편당 한 셰프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음식철학과 인생의 여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여기에 나온 한 멕시코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Barbacoa (소고기/양고기를 양념해 오랜 시간 푹 찐 것) 음식점을 하는 집에 일찍 시집가서 온갖 노동과 남편의 폭력으로 힘든 삶을 살다가 맨발로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도망 온 후 필라델피아에서 Barbacoa 타코 집을 차렸는데 이 집이 메인스트림 셰프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소위 대박이 난 것이다. 필라델피아에 1박 2일 갈 일이 있었을 때 나는 무리해서라도 이 곳에 가보고 싶어서 결국 아침 8시에 갔다 (이미 방송을 탄 곳이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일찍이 아니면 대기가 너무 길었다).
당연히 맛있었고, 음식과 분위기가 묘하게 로컬 분위기가 나서 미국이 아닌 중남미 여행 중에 먹는 느낌이 났다. 훌륭한 타코였지만 다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침 8시부터 기름진 양고기 타코를 먹어 배를 가득 채운 후 아침 햇살을 받으며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밀려온 허무감과 자아 성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제 웬만한 타코는 다 먹어본 것 같으니 집에 돌아가면 김치찌개나 끓여먹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의 재발견 - 타코의 생활화
타코의 인기는 점점 올라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수준 있는 타코 집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동네에서 가장 선호하는 타코 집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이다. 하나는 미국의 젊은 셰프가 전통적인 타코 메뉴에 더해 창의적인 신메뉴를 계속 개발하여 맛있게 만들어내는 곳, 다른 하나는 미국에 건너온 멕시코인이 자기가 답답해서 개업한 후 멕시코 정통 스타일대로 만들어내는 곳이다. 둘 다 맛있기 때문에 이젠 그냥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는 순간 가까운 곳에 간다.
이제 타코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가끔 한 번씩 먹어주지 않으면 생각나는 그런 음식이 되었다. 가끔씩 한국에 들어갔다가 돌아와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로 이 타코다. 이쯤 되면 나도 충분히 타코를 심각하게 좋아하지만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타코에 대해 책 쓰고 TV 프로그램 만들고 하는 사람들이 타코를 지칭하여 한 말들이 내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타코는 다양한 재료와 문화를 담아내는 캔버스다.” “단위 면적당 가장 맛있는 음식이 타코다.” 음, 상당 부분 동의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