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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Sep 23. 2019

자이로 (Gyro)

+ 도네르 케밥 (Doner Kebab) / 샤왈마 (Shawarma)

카이저 호프와 기로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먼 옛날), 학교 주변에 ‘카이저 호프'라는 맥주집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독일식 맥주집 인테리어(어두운 색깔의 나무 테이블과 의자)에 넓은 단체석을 구비한 덕분에 과 모임이나 동아리 모임이 있을 때 2차로 자주 들르던 코스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정체모를 안주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하여 ‘기로스'였다. 바삭하게 잘게 잘라진 고기 위에 생양파를 얹고 그 위에 요거트 크림 같을 것을 얹어 내놓는 안주였는데 제법 인기가 있어서 메뉴 시킬 때면 ‘맥주 피처 둘에 기로스 하나 쏘.야. 하나 이렇게 주세요'가 레퍼토리였다. 나는 카이저 호프의 분위기가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기로스가 맛있어서 은근 카이저 호프를 2차 장소로 밀곤 했다. 이 기로스가 독일이 아닌 그리스 음식이라는 것은 얼마 후 알게 되었지만 내가 지금 미국에서 즐겨 먹는 자이로 (Gyro의 미국 발음, 사실 그리스 본토 발음으로는 이로스 Yeeros 인 것 같다)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30대가 되어서야 불현듯 깨달았다 - 그래, 자이로가 바로 그 기로스 Gyros 구나. 나는 예전부터 이걸 좋아했던 것이었어.


터키 케밥의 발견

자이로는 그리스 음식이지만 사실 터키의 도네르 케밥 (Doner Kebab), 그리고 레바논/아랍 식당의 샤왈마 (Shawarma)와 거의 비슷하다. 이 음식을 상징하는, 고기를 차곡차곡 쌓아서 세로로 빙빙 돌리면서 구워낸 후 바삭해진 겉 부분을 면도하듯 베어내어 서빙하는 모습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터키 케밥을 맛보면서였다. 그 장소는 터키도, 이태원이나 경리단길도 아닌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회사에 출근하기로 한 날까지 마침 한 달이 비어서 나는 대학생 때 항상 꿈꾸던 유럽 여행을 떠났다. 문제는 시기가 1월이었다는 것이다. 너무 춥고 일찍 어두워져서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배가 고팠다. 뭐 먹을 게 있는지 보니 호스텔 앞의 노점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마침 가격도 저렴해서 주머니에 남아있던 유로 동전들을 긁어모아 사 올 수 있었다. 좀 리스크가 있는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싼 값에 저녁을 때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입 베어 무는데 뭐랄까, 나의 경계심이 부끄러울 만큼 너무 입맛에 잘 맞았다. 또한 하루 종일 추운 날씨에 돌아다닌 노곤한 몸을 위해 칼로리를 공급하는 기름진 맛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또 사 먹었고 서유럽의 다른 나라에 가서도 눈에 보이면 사 먹었다. 


내가 유럽에서 경험한 첫 터키 케밥과 가장 비슷한 느낌의 사진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기회가 되면 터키 케밥집을 찾아다녔다. 아무래도 좀 헤비한 음식이라 그런지 배가 고프면 더욱 당기는 면이 있었다. 이후에 터키 여행을 가서도 당연히 먹었다. 그런데 터키에서 먹어본 도네르 케밥은 물론 맛있었지만 나는 솔직히 오리지널보다 유럽에서 파는 도네르 케밥이 더 맛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상당수의 터키인들이 독일을 비롯해 많은 서유럽 국가들에 퍼져서 케밥을 팔고 있기 때문에 본토의 기술(?)을 다 가지고 있는 데다 서구권이라 그런지 좀 더 정키함이 더해져서 (좀 더 감칠맛 나고 리치한 소스를 사용하는 것 같다) 더 자극적인 맛이었다. 


위 사진보다는 좀 더 정돈되고 세련된 느낌의 터키 케밥


미국에서 처음 접한 샤왈마

그렇게 터키 케밥을 곧잘 사 먹다가 내가 중국에 가게 되면서 한동안 케밥을 잊고 살았다. 중국에서는 터키 음식이 딱히 눈에 띄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중국 음식의 세계에 빠져 지내느라 바빴다. 그러다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고, 학교 앞에 샤왈마라는 음식을 팔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익숙한 vertical broiler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의 뇌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침 나오는 기억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치킨 샤왈마 한 그릇을 시켜 먹어봤다. 그런데 이 음식은 내가 기억하던 케밥의 맛과는 약간 달랐다. 고기는 거의 비슷했지만 함께 서빙되는 야채와 허머스 (hummus, 병아리콩을 갈아 만든 스프레드), 마늘 퓌레가 좀 더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허머스의 경우 이제 미국에서는 없는 슈퍼마켓이 없을 정도로 대중화되었고 나도 즐겨 먹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아직은 낯선 음식이었다. 그렇지만 쌀과 고기와 야채를 함께 서빙한다는 장점 때문에 역시 자주 사 먹게 되었고 그러면서 점점 입맛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좀 더 담백한 스타일인 치킨 샤왈마 랩(Wrap)
허머스, 타불리 샐러드와 함께 서빙되는 레바니즈 샤왈마


'기로스'와의 재회. 

주중에는 주로 학교 안이나 주변에서 끼니를 때우는 음식을 주로 먹었지만 주말이면 와이프와 함께 보스턴 시내의 맛집을 찾아다니곤 했다. 그렇게 발견한 곳 중 하나가 바로 자이로/Gyros/기로스 집이었다. 가게 내에서 세 가지 다른 고기의 vertical broiler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부터 기대가 되었는데 한 입 먹고 나서 느꼈다. 그래! 이 맛이야. 뭔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유럽에서 먹었던 정키한 터키 케밥의 느낌에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Tzatziki 소스가 폭신한 Pita 빵과 잘 조화되어 맛있었다. 와이프도 뭔가 정키한 것이 먹고 싶었는지 너무 좋아했다. 이 집 자이로는 중독성이 있어서 가끔 이걸 먹기 위해 보스턴에 나올 일을 만드는 경우가 생겼다. 보스턴의 유명한 야구장인 Fenway Park 근처에 있어서 야구장 나들이 온 사람들도 이 가게에 많이 들르는 것 같았다. 나와 와이프의 음식 취향이 잘 맞다 보니 이 집 자이로를 자주 먹었고 결국 보스턴에 놀러 온 처제까지 이 집의 마니아가 되었다. 이후 보스턴을 떠나 워싱턴에 와서도 이 집을 대체할 대체 식당을 발굴해야 했는데 다행히 적당한 집을 한두 곳 찾기는 했지만 이 곳만큼의 느낌은 아니다. 언젠가 보스턴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이 집은 아마도 다시 가게 될 것이다. 


한눈에 보이는 맛의 향연. 그리고 정키함 
폭신폭신한 Pita 빵은 그 자체로도 맛있다


나는 물론 터키 케밥도 샤왈마도 좋아한다. 하지만 자이로를 아주 조금 더 선호하는데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나는 돼지고기를 소/양고기 믹스보다 선호하는데 돼지고기를 같은 방식으로 서빙하는 것은 자이로뿐이다 (그리스만 이슬람 국가가 아니기 때문). 둘째, 나는 요거트 베이스의 Tzaziki 소스가 Hummus보다는 양념된 고기와 좀 더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터키 케밥 중 가장 좋아하는 것도 도네르가 아닌 빵과 요거트가 함께 곁들여진 이시켄데르 iskender 케밥이다). 마지막으로 자이로를 싸주는 폭신폭신한 Pita와 케밥을 싸는 터키식 빵, 샤왈마를 싸는 납작한 flatbread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지만 제대로 잘 구웠을 때 빵이 가장 맛있는 것은 아무래도 자이로 같다.


이렇게 좋아하는 자이로이지만 요즘은 사실 자주 먹지는 못한다. 아무래도 기름지고 헤비한 느낌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사무용 의자에 앉아 별 운동도 하지 않는 회사원으로서 점심시간에 자이로를 자주 사 먹기는 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도 먹고 싶을 때면 샤왈마를 먹는다 (허머스의 주원료인 병아리콩이 슈퍼푸드로 알려져 있고 중동 스타일의 각종 쌉쌀한 맛의 야채를 넣어 주기 때문에 조금 더 건강한 느낌을 준다). 아무튼 이 3종의 음식은 내가 배부르지 않은 한 절대 마다하지 않는 메뉴이다. 최근에 알게 된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타코 종류 중 하나인 Al Pastor도 사실은 레바논 이민자들이 들여온 샤왈마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 고기의 양념이나 향신료에 나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 전생이 있다면 나는 아마도 지중해 쪽 출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생은 그렇다 치고 현생은 한국 출신이어서 드는 생각이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에 한국식 양념 (불고기/제육/닭갈비 양념)을 해서 같은 그릴에 같은 방식으로 구워 먹어도 맛있지 않을까이다. 미국에서 한국식 타코는 꽤나 대중화되었는데 한국식 자이로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지리적 상황과 이민자의 구성을 고려할 때 북미에서는 타코가 자이로보다 더욱 익숙한 음식이다. 따라서 타코라는 형식에 한국 스타일을 믹스해 넣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다가가기 쉬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자이로/케밥이 더욱 친근한 유럽에서는 한국식으로 케밥을 만들어 팔면 친근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여담이지만 자이로/ 케밥/ 샤왈마를 상징하는, 세로로 빙빙 돌리면서 고기를 구워내는 특유의 기구 (Vertical broiler /Spinning griller)는 대체 누가 처음 발명 및 대중화한 것일까? 언제 누가 와서 먹어도 항상 고기의 바삭한 부분을 촉촉한 부분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하다니, 누군지 모르지만 참 민주적이고 훌륭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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