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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귀만 있었으면

<정재호 원장의 수술 일기>




사춘기가 일찍 찾아온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런데 상상도 못 했던 반전은 중학교에 입학 후 일어났다.
다른 친구들은 키도 쑥쑥 크고 팔, 다리도 거기에 맞게 길쭉길쭉 길어지는데, 나는 키는 자라지 않고 앉은키만 커졌다.
다리가 짧아진 건가?
한 때 키 큰 사람들의 세계(?)를 경험한 나로서는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20대에 옷을 사면 팔 길이, 바지 길이를 짧게 수선해야 하는 것이 내어 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받는 일이기도 했다.
40, 50대가 되어서야 겨우 팔, 다리 짧은 게 그리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게 되었다.
나이 들어 보니 나보다는 내 주위, 내 아이의 팔, 다리가 긴 것이 더 중요해진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타인의 고통을 보면 내가 스트레스받고 툴툴대는 것이 얼마나 허영스러운 일인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20대 청년의 소이증 수술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상당히 독특한 색으로 염색해서 기억에 남아 있는 예전에 방문했던 환자분이다.
어머니와 함께 수술 날짜를 잡은 뒤 어제 드디어 귀를 만들게 된 것이다.


청년의 작은 귀...
긴 머리로 이 시간까지 가리고 살던 귀.


나도 너도 가리고 사는 부분이 있겠지만 그 어떤 것이 이만큼 가리고 싶을까?
최근 들어 내 마음을 약간 시끄럽게 했던 자존심 싸움 문제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수술은 유난히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성인이 될수록 수술은 더 까다롭고, 출혈도 잘 되고,
결과도 6,7살에 하는 것만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훨씬 더 신경을 써서 수술하다 보면
8, 9시간이 금방 지나있다.


길고 긴 수술을 끝내고 저녁 여덟 시가 넘어 수술방에서 나왔다.
아침에 텀블러에 담아둔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디야? 왜 안 와?"


친구가 전화기 너머에서 얘기한다.
아 참, 동아리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수술은 무사히 잘 마쳤지만
오늘도 나는 약속을 못 지킨 불량 친구가 되어버렸다.
환자가 마취에서 깨기를 기다리며 한숨을 돌리는 동안,
내 아이들에 대한 기대나 욕심은 되도록 버리고
지금 곁에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잘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수술을 거듭할수록 나는 내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더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게 된다.
길고 어려운 수술이 내게 선사한
참으로 간단하지만 잊기 쉬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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