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8
그분의 정원에는 유리공예품으로 만든 벌새 피더는 물론이고, 벌새들이 목욕을 할 수 있는 작은 분수대도 있었다. 벌새들은 아침마다 장미꽃잎 위의 이슬을 먹고, 장미꽃과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 집이 벌새들의 구멍가게라면, 그분의 집은 디즈니랜드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싸구려 피더를 사랑해주는 존스노우와 레나가 너무나 고마웠다.
아침저녁으로 피더를 찾아오는 벌새들 중에 특이하게 생긴 새가 섞여 있었다. 조지아 주에는 루비뜨로티드 허밍버드밖에 날아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다른 종은 아닐 테고... 다른 벌새들과 달리 몸 이곳저곳에 검은 점이 있고 얼굴 모양도 좀 이상해서 ‘점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벌새들 중에도 드물게 알비노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점박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점순이는 다른 벌새들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겁이 많아서 창 안쪽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카메라를 들어 올려도 금방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점순이가 나타날 무렵 이상하게 존스노우도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수컷이 나타났는데 존스노우보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못 생겨 보이는 녀석이었다. 존스노우가 잠시 먼 곳의 꽃들을 찾아 원정을 떠난 새 삼일천하를 누리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튼 그 수컷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다른 암컷들과 함께 점순이가 찾아왔다. 점순이 사진도 찍어서 기록하려고 줌으로 당겨서 보았더니, 점순이는 점만 있는 게 아니라 부리 위쪽 이마 털도 울룩불룩하고 눈도 퀭한 게 영 이상했다. 그냥 흉측하게 생긴 새이거나, 늙고 병든 새이거나, 어린 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외모가 이상한 것 빼곤 움직임과 몸 크기가 모두 정상이고 건강해 보였다.
다음날이 되자 점순이 옆의 벌새도 가슴에 검은 점이 생겼고, 그 옆의 벌새도 뒤통수가 허전해 보였다. 그래서 뭐라고 검색할까 고민하다가 ‘못 생긴 벌새(ugly hummingbird)’로 검색을 했더니 구글에 수많은 점순이들의 사진이 떴다. 나 말고도 점순이 벌새들을 찍어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 못생긴 벌새들은 원래 못 생긴 것이 아니라, ‘몰팅(molting)’이라 불리는 털갈이를 겪고 있는 벌새라고 했다!
단벌 신사인 동물들과 새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 털갈이를 한다. 벌새들의 경우, 보통 비행에 매우 중요한 날개털과 꼬리털은 1년에 단 한 번 겨울을 보내는 곳에서 갈지만, 목, 머리, 배와 등의 털은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번 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점순이의 불규칙하게 울룩불룩 튀어나온 털은 교체 중인 털인 것 같았다. 검게 보이던 부분은 자세히 보면 털이 없고 속의 검은 피부가 드러난 것이었다. 새들이 털을 갈아입는 방법은 원래의 털이 빠지고 새로운 털이 자라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고, 완벽한 새 깃털을 장착한 다음에서야 머나먼 철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기능하는 새로운 깃털들이야말로 그들이 지닌 생존수단이니까.
그렇다면...나의 사랑 수컷 벌새 '존스노우'가 더 이상 오지 않는 게 아니라, 존스노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 못 생긴 수컷 벌새가 바로 존 스노우란 말인가! 발목에 금속 발찌를 채워 표시를 한 것이 아니기에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동그스름한 두상과 커다랗고 초롱한 눈, 오동통한 몸집에서 존스노우의 향기가 났다. 그동안 존스노우는 내가 자기를 못 알아봐 줘서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어쩐지 정확히 존스노우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각도로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 존스노우, 네가 대머리에 배불뚝이가 된다고 해도 난 널 계속 사랑할 것이다. 넌 내 첫사랑 벌새니까!
나의 오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더에 단골로 찾아오는 새 중에 머리에 연두색 무늬가 있는 암컷 벌새가 있었다. 그래서 그 암컷 벌새에게 ‘연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처음에는 연두색을 흰색으로 착각해서 ‘흰줄박이’라고 불렀는데, 자세히 보니 흰줄이 아니라 정수리 부근에 이끼 같은 연둣빛 털이 나 있었다. 당시에 블로그에 관찰기를 기록하면서 연두가 '노화'의 현상으로 탈색된 빛깔의 머리털이 나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적어두었다. 그러자 다음날 내 블로그에 누군가가 댓글로 정정을 해주었다. ‘눈바람꽃’이라는 분이었는데 연두의 머리 무늬는 털이 아니라 바로 ‘꽃가루’라고 말이다! 아마 깊숙이 머리를 들이밀어야 넥타를 먹을 수 있는 꽃의 넥타를 먹다가 머리에 꽃가루가 묻었을 거라는 것이다. 그게 곧 꽃들이 벌새를 수분에 이용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도무지 벌새 머리에서 자랄 것 같지 않던 빌로드 같은 질감의 잔털의 정체가 '꽃가루'였다니! 그러니까 노란색 꽃가루가 벌새의 초록빛 머리털에 덮임으로써 연둣빛을 띠게 된 것이다.
나의 무식한 추측을 보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눈바람꽃’님이 댓글을 달아두셨을까? 눈바람꽃님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캘리포니아 남쪽의 휴양지 같은 해변 도시에 사신다는 그분이 자기 정원에서 촬영한 벌새 사진들은 내 허접한 사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선명했다. 카메라도 더 좋지만 사진 기술도 뛰어났고, 장미를 비롯해서 온갖 꽃나무와 화초가 심어진 아름다운 정원에는 루비뜨로티드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종류의 벌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분의 정원에는 유리공예품으로 만든 벌새 피더는 물론이고, 벌새들이 목욕을 할 수 있는 작은 분수대도 있었다. 벌새들은 아침마다 장미꽃잎 위의 이슬을 먹고, 장미꽃과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 집이 벌새들의 구멍가게라면, 그분의 집은 디즈니랜드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싸구려 피더를 사랑해주는 존스노우와 레나가 너무나 고마웠다.
눈바람꽃님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의 눈은 한층 높아졌다. 그분께 벌새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쪽지를 보냈더니 수동 기능을 사용하여 어떤 모드로 어떤 속도로 찍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셨다. 그리고 내 사진이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칭찬도 해주셨고, 루비들이 모두 남쪽으로 날아가 버리는 겨울에 한번 자기 집으로 벌새를 보러 놀러 오라는 말씀까지 해주셨다. 그 동네에는 철새 이동을 하지 않는 루포스 벌새와 애나 벌새 등이 살고 있었다. 벌새 덕분에 전혀 다른 곳에 사는 한국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눈바람꽃님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는 끝내 방문하지 못했지만, 눈바람꽃님은 그 후로 나의 ‘벌새 멘토’가 되어주셨다.
벌새 사진을 찍기 전까지는 내가 사진을 잘 찍는 줄 알았다. 사진 전공은 아니지만 20대 초반에 문화센터에서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배웠고, 프리랜서 기자로 취재를 다니면서 10년 넘게 직접 사진도 찍었다. 카메라를 조금씩 높은 사양으로 바꿔가며 인물 사진과 풍경 사진을 찍고, 비디오 저널리스트 과정을 배운 후부터 영상 촬영과 편집도 하다가 미국에 와서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석사 전공까지 했다. 경력만 들어보면 그럴 듯하지만, 솔직히 영상스토리텔링은 너무나 복합적인 작업이다보니 기획과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느라 오히려 촬영 장비와 촬영 기술은 가장 간편한 방식을 선택하는 경향이 생겼다. 인터뷰어를 따로 모시고 가지 않는 이상, 직접 인터뷰를 해야 하기에 카메라를 정교하게 조작하고 세팅할 시간이 모자라서 아주 어두운 곳이 아니면 대체로 자동기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사양의 수동기능이 있는 DSLR을 사놓고도 오히려 플래시 조명을 꺼둔 상태의 '자동' 촬영모드를 선호했다. 고급 카메라일수록 자동 모드의 촬영 기능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차니스트에 컴맹 출신답게 설명서에 작은 글씨로 적힌 수동 기능을 읽지 않은 채 몇 년이 지나버렸다.
나름 고급인 DSLR 카메라만 믿고 '자동' 모드로 벌새를 찍으려 해보았더니 벌새들이 코웃음을 쳤다. 벌새들은 너무 작고(새끼손가락 크기), 너무 빨리 휙휙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은 채 고정된 미소를 보여주는 커다란 얼굴의 사람들이나 가만히 있는 풍경 또는 정물을 찍을 때나 자동기능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동으로 찍었더니 벌새는 번번이 초점을 벗어나서 흐리멍텅하게 찍혔다. 1초에 50-80회 가량 날개를 젓는 벌새를 60분의 1초나 120분의 1초 속도로 찍어서 초점을 맞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인물 사진이라면 이 정도 속도로도 충분히 좋은 사진이 나온다) 수동 포커스를 쓰려니 안경을 써야 하는데, 평소 안경을 안 쓰고 다니는 습관이 있다 보니 안경을 찾아서 쓰고 카메라 스위치 올리고 초점 조절하다 보면 이미 새는 떠나고 없다. 좀더 민첩성을 길러야 한다! 벌새 존스노우와 레나가 나에게 '나무늘보'라는 별명을 붙였을지도 모른다...게다가 나는 창문 안쪽에 붙어서서 창밖의 벌새를 찍어야 했기에, 카메라 렌즈가 두꺼운 창유리를 통과하여 초점을 맞추느라 사진이 더 흐릿하게 찍혔다. 당연히 절대 닦지 않던 창문도 매일 안팎을 골고루 닦게 되었다.
그래도 설명서를 읽을 생각은 하지 않고, 표준렌즈가 별로인가 싶어서 줌렌즈를 주문했다. 전문가용 줌렌즈는 너무 비싸서 보급형 줌렌즈를 구매했다. 보급형 저사양 줌렌즈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줌렌즈만 있다고 당장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셔터를 누를 때 떨리는 내 손이 문제인가 싶어서,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고정하여 찍기로 했다. 부엌 현관문 바로 앞에 삼각대를 설치한 후, 비로소 설명서에 적힌 수동 모드 사용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초점방식도 벌새몸통 크기에 맞도록 세팅하고, 셔터스피드도 최대한으로 높이고, 조리개도 최대한으로 열었다. 가장 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벌새 스탠드를 옮겨두고, 벌새들이 놀라지 않도록 창문 블라인드도 적당히 내린 다음 벌새를 기다렸다.
문제는 탤런트인 벌새들이 전혀 카메라를 염두에 두지 않고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우선 그들은 내가 카메라 앞에 대기하면 미리 눈치를 채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를 겨누는 시커멓고 커다란 렌즈를 생명체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피하는 것 같았다. 이건 벌새가 아닌 다른 새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창안쪽에 서서 맨눈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다가, 내가 카메라를 집어드는 순간 도망을 쳤다. 사실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는 행위를 영어로 shooting이라고 하는 만큼, 초점을 정확히 맞추어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행동은 총을 쏘는 행동과 맞먹는다. 셔터 누를 때의 '찰칵'하는 소리도 '탕'하는 총소리와 어딘가 비슷하다. 모르는 척해도 벌새들의 눈에는 카메라 렌즈가 거대한 대포의 포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킬러들의 스나이퍼에 조준경이 붙어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카메라와 총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 물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벌새들이다보니 나와 벌새들의 대치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 벌새들이 항복하고 나타나긴 했다. 다만, 기습을 하듯이 나타나서 이전보다 더 빨리 먹고 튀었다. 그나마 겨우 포커스를 맞췄다 싶으면 어느샌가 나타난 구름이 잠시 해를 가리는 바람에 기껏 맞춰놓은 ISO, 셔터 스피드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화면이 지나치게 밝아진다던가, 그 반대일 경우 너무 어두워진다던가 한다. 이 모든 걸 다 했다 싶은 때에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새들이 어디 멀리 꽃밭으로 원정을 갔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는 양지에 놓여 있던 벌새 스탠드에 이제 그늘이 드리워서 다시 밖으로 나가 스탠드 위치를 옮겨두어야 한다. 어느 정도 좁혀졌던 벌새들과 나의 거리는 카메라를 설치한 순간부터 다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벌새를 사진에 담았다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화질이 좋은지 선명한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모든 게 완벽하게 찍힌 것 같아서 컴퓨터로 다시 보면 여전히 원하는 선명도에는 미치지 못하고, 남의 사진들을 자꾸 보다보니 전문가들이 찍고 포토샵으로 다듬은 사진에 비하면 퀄리티가 너무 떨어져서 실망스러웠다. 눈은 한번 높아지면 좀처럼 낮아지기 어렵다. 벌새 사진 찍는 법에 대한 미국 유튜브 강의를 찾아들어도, 제대로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결국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카메라와 환경에 맞춰 나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 실패를 맛보고, 매일 새로운 걸 조금씩 배웠다. 다행히 그 실패의 기간이 존스노우의 털갈이 기간과 일치한 게 약간 위로가 되긴 했다. 내가 카메라를 완벽하게 다루어 찍는다 하더라도 존스노우가 비루먹은 새처럼 털이 빠진 상태이면 찍으나마나였다. 그러나 존스노우의 털갈이 기간도 끝나가고 있으니 좀더 속도를 내야 했다. 그해 8월에 비가 자주 오고 기온이 예년보다 낮아서 어쩌면 벌새들이 조금 더 빨리 남쪽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마음은 타들어갔지만, 실력이라는 게 갑자기 향상되지는 않는다.
벌새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느리고 거대한 곰처럼 보일 것이기에, 유리창 속으로 나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파파라치를 하기엔 내 카메라도 나의 움직임도 너무 큰 것이다. 벌새는 나의 모델이 되려고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찍고 싶다면, 내가 낮추고 맞추고 더 단련할 수밖에 없다. 사진이 크게 향상되진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카메라의 수동기능을 거의 다 익히게 된 건 좋은 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포토샵 기능도 익히느라 오랫동안 서랍속에 잠자던 와콤태블릿까지 꺼내서 사용하게 되었다. 포토샵을 익히고 나서 보니, 대부분의 벌새 사진들이 포토샵 보정을 거친 것이었다. 포토샵으로 목깃털의 황금빛을 강조하지 않고는 그렇게 화려한 결과물이 나올 수 없었다. 이건 탤런트나 연예인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보면 누군지 못 알아보는 이유와 비슷하다. 맨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색상과 형태를(사람의 경우)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포토샵이야말로 사기의 근원이요, 불행의 근원이었다! 절대 다다를 수 없는 이상형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여겨,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밝기와 선명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사진만 수십수백장씩 찍어대고 있었지만, 그러다보니 수동 기능에 익숙해졌고, 새들의 섬세한 움직임과 표정이 좀더 눈에 들어왔다. 새들이 웃고 있는지 찡그리고 있는지도 보였다. 그들은 가끔씩 평화롭게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안일하게 자동 초점 방식만 믿고 지낸 것이 후회가 되었다. 자동초점이 보여주지 않은 세계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놓친 진실은 얼마나 많았을까... 지난 몇달간의 맹인시절을 극복하려면 내년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번 지나간 벌새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보다못한 나의 블로그 이웃 눈바람꽃님이 나에게 팁을 주셨다. 카메라 모드를 AI Servo AF로 맞추고, 노출은 자동에 맞추라고 했다. 그것만 적용해도 한결 나은 사진이 나왔다. 사진이 일취월장 수준으로 나아지고 있다고 칭찬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는 동안 존스노우의 털이 조금씩 자라나 마침내 오른쪽 턱밑에 튀어나온 하얀 심 하나를 제외하면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다. 나의 사진 실력도 이제 한 10% 부족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우연처럼 마법같은 햇살이 비쳐드는 아침이 찾아왔다. 털갈이를 완벽하게 마친 존스노우가 정확히 내가 원하는 위치와 방향으로 앉아 당당히 포즈를 취하는 걸 보자 느낌이 왔다. 오늘은 내가 원하던 사진을 얻을 수 있겠구나, 라는. 이제까지 존스노우가 내 카메라를 피해 달아났던 건, 순전히 외모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마음대로 추측했다. 황금빛 햇살 덕분에 존스노우의 목과 등이 포토샵을 한 것처럼 반짝였고, 나는 스스로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사진들을 찍기 시작했다. 존스노우는 뭔가 아는 것처럼 이리저리 다양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러나 30분도 안 돼서 돌연 잔디깎는 아저씨가 등장하는 바람에 1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골든타임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 마법같은 아침은 또 여러 번 간간이 찾아왔지만, 이번엔 내가 다른 일로 바쁘거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은 내가 존경하는 벌새 사진가인 후안 바하몬이라고 예외가 아닌 모양이었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장비를 구입하고 테스트를 하고, 남미의 열대우림 속에 찾아들어가서 며칠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원하던 벌새를 찾아 사진을 찍으려는데 벌새가 등을 돌리고 있거나, 교묘히 몸을 가리고 있거나, 절정의 꽃은 다 놔두고 시들어빠진 꽃에 앉아서 넥타를 먹고 있거나... 후안 바하몬의 '소박한' 소망은 벌새가 '괜찮은 배경에서 얼굴과 눈동자를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날개를 저으며 꽃꿀을 먹는 평범한 장면을 포착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이건 고도의 기술뿐만 아니라 인내와 헌신, 행운까지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완벽한 순간을 만나도 그 순간은 언제나 짧게 끝나버린다.
게다가 완벽한 순간이란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도 내일과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어느 평범한 날에 아무런 예고없이 스르륵 찾아왔다가 꿈처럼 사라진다. 우리가 기다리는 어떤 기회나 기적도 수없이 자주 우리를 찾아왔지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새 떠나보낸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기회는 또 올 것이다. 그런 순간이 보석처럼 묻혀있는 평범한 오늘에 대한 기대감만 잃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