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만의 개기일식과 벌새의 반응

벌새와 나의 이야기-9

by 최리라
덕분에 나는 99년만의 개기일식이 벌어지던 그 순간, 오후 2시 38분에서 40분까지 약 2분 동안을 벌새 존스노우와 함께 보냈다. 어둠속에서나마 존스노우를 가까이서 느끼며, 마치 피더가 나 자신인양 희열에 빠졌다.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을 그 때, 나는 나의 벌새 존스노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만의 금환식 파티였다. 잠시 후 존스노우가 넥타통을 떠날 무렵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날 오후, 그러니까 2017년 8월 22일 낮 2시 38분경 내가 살던 조지아주 에슨스의 개기일식이 시작되었다. 내가 '에슨스의 개기일식'이라고 말한 이유는, 미국땅은 너무나 넓어서 지역마다 개기일식을 목격한 시점이 모두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무려 99년만에 일어나는 개기일식인데, 태양과 달과 지구가 일렬로 배열될 때 달의 본그림자가 놓이는 지역에 있어야만 온전히 개기일식을 관찰할 수 있고 다른 지역에 있으면 부분일식으로 보인다고 했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시점에 달의 본그림자가 놓이는 지역은 영광스럽게도 미국이었고, 서부 태평양 해안부터 동부 대서양 해안까지 90분 동안 대륙을 가로지르며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미국 관광업자들은 대대적으로 개기일식을 홍보했고,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미국내에서도 개기일식을 좀더 잘 관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내고 관찰이 용이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클립스용 안경을 구하고 이곳저곳 모여서 개기일식 기념이벤트에 참여했다. 단 2-3분 가량 일어날 구경거리를 위해서 말이다. 심지어 나의 지인 한분도 한국에서 미국까지 개기일식을 보러 날아왔고, 또 한 친구는 때 맞춰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이미 봄부터 눈에 이상이 생긴(의사는 노안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조지아의 강렬한 햇빛이 원인인 듯하다) 나는 그 개기일식용 안경이라는 것도 신뢰할 수 없어서 몸을 사렸다. 나의 선택은 그 특별한 순간을 나의 벌새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남편의 박사과정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논문을 쓰고 있는 단계였으니 언제든 '짐을 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모든 게 '마지막'처럼 지나갔다. 다음 해에도 그곳에서 벌새들을 보며 머무를지는 알 수 없었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면 벌새따위 잊고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옳았다. 모기방지 스프레이를 온몸에 뿌리고 뒤뜰로 나가 벌새 넥타통에서 2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캠핑용 의자를 펴고 앉았다. 그때까지 나는 벌새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적이 없고, 언제나 부엌 창 안에서만 벌새들을 관찰했었다. 내가 밖에 나와 있는데도 벌새들이 피더에 접근할지 의문이었다.


뒤뜰의 경계를 이루는 윈터베리나무 숲에서 카디널과 블루그레이 냇캣처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새 소리, 벌레 소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1시에 점심약속에서 돌아왔을 무렵에만 해도 사방이 평소 낮처럼 환했는데, 2시 36분경이 되자 급속히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피더 부근도 저녁 9시경처럼 어두워졌다. 차이라면 부엌 창 안의 불빛이나 근처 가로등의 불빛이 꺼져있다는 점. 그때 레나로 추정되는 암컷 벌새가 피더에 찾아와서 한참 동안이나 넥타를 먹었다. 꽤 오랫동안 먹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저녁이 왔다고 생각하고 하루를 마치고 잠자러 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낮이라면 당장 근처에서 망을 보던 존스노우가 나타나서 레나를 쫓아버렸을 텐데 보이지 않아서인지 가만히 두었다. 어쩌면 아직 어스름이 깔린 정도이다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내가 무서워서 그냥 참고 있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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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가 넥타를 포식하고 떠날 무렵 땅의 그림자마저 사라질 정도로 어두워지자 존스노우가 피더에 나타나 넥타를 빨기 시작했다. 한두 번 먹고 날아가는 게 아니라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토포 상태로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식사였다. 어서 먹고 자러 가야 하니까 용기를 냈거나, 내가 잘 안 보여서 안심을 했거나, 아니면 어둠이 자기를 숨겨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99년만의 개기일식이 벌어지던 그 순간, 오후 2시 38분에서 40분까지 약 2분 동안을 벌새 존스노우와 함께 보냈다. 어둠속에서나마 존스노우를 가까이서 느끼며, 마치 피더가 나 자신인양 희열에 빠졌다.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을 그 때, 나는 나의 벌새 존스노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만의 금환식 파티였다. 잠시 후 존스노우가 넥타통을 떠날 무렵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2F2A5057-g-1.jpg 개기일식이 진행되던 어둠 속에서 넥타를 먹으며 긴 밤을 준비하는 존스노우. 몰팅 때문에 얼굴 주변 털이 새로 자라고 있다.


길고 긴 철새 여행을 앞두고 영양분을 비축하느라, 내가 이제 '심술쟁이 뚱땡이'라고 부를 정도로 몸이 뚱뚱해진 존스노우는 9월이 되면 남쪽으로 떠날 것이고, 나도 내년 봄에 어디에 있을지 기약할 수 없어서 존스노우와 다시 만날 확률은 매우 낮았다. 그런 우리가 (비록 인간과 벌새 사이의 관계이긴 하나) 이 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게 너무나 특별했다. 게다가 존스노우와 레나는 '동물들도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숨죽이고 일제히 울음과 활동을 멈춘다'라는 속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기까지 했다. 대낮에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서 세상이 컴컴하게 되는 일은 얼마나 잦은가. 벌새들에게 오늘 이 순간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매일 매순간 생존투쟁을 벌이는 그들에게 99년만의 개기일식은 그저 갑자기 낮이 짧아져서 일찍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해야 하는 사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벌새 그네


가끔은 벌새를 통해 나의 욕망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과정을 돌아보기도 했다. 처음엔 그냥 '루비뜨로티드 허밍버드(Ruby-throated hummingbird)'가 우리집 피더에 나타나기만을 바랐는데, 얼마 후엔 암컷들 말고 목에 루비빛 반짝이 깃털이 달린 수컷이 찾아오길 바랐다. 수컷 벌새가 마침내 찾아오자 이제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수컷 벌새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사진을 찍기 원했다. (물론 여기서 카메라 장비와 렌즈에 대한 욕망이 곁가지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수컷 벌새의 사진을 찍다보니 벌새가 플라스틱 피더에서 꿀을 빨고 있는 장면이 아니라 진짜 꽃에서 꿀을 빠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졌다. 그래서 뜨거운 조지아의 여름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마다 근처 보태니컬 가든에 출근도장을 찍으며 벌새 사진을 찍었다.


그것까지 하고 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이번엔 우리 동네에는 찾아오지 않는 다른 종류의 멋지고 화려한 벌새들을 보고 싶어졌다. 사실 북미대륙을 세로로 길게 잘랐을 때, 오른편으로는 루비뜨로티드 허밍버드 한 종류밖에 찾아오지 않았고, 왼쪽편 중앙에서부터 서쪽 해안까지는 다채로운 종류의 허밍버드들이 찾아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다른 종류의 허밍버드를 관찰하려면 텍사스까지 내려가거나 아니면 캘리포니아쪽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다. 벌새에 빠져들 무렵은, 유학자금이 다 떨어져서 한국에 남아 있던 집까지 팔아야 했던 유학말년 시절이었으므로 고작 벌새를 보자고 서쪽까지 여행을 떠날 형편이 못 되었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나의 블로그 친구 눈바람꽃님이 찍은 사진을 통해 애나스 허밍버드, 루포스 허밍버드, 블랙친드 허밍버드, 알렌스 허밍버드, 코스타스 허밍버드 등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서, 핀터레스트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각종 아름다운 벌새 사진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벌새에 빠지기 전에도 이미 8년 가량 버드와처(birdwatcher)로 지내왔고, 각종 아름다운 새들을 보며 '아 정말 신이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벌새들을 바라보니 그런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이건 물론 꽃, 곤충, 어류 등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관찰할 때도 드는 생각이었지만...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인간이 만든 벌새그네에 벌새가 앉아 있는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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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그네에 벌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벌새만큼 인간이 만든 것을 사랑하고 편견없이 이용해주는 새가 또 있을까? 그 사진이 너무 신기했고, 그 정도 그네라면 나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과연 우리집 벌새들도 내가 만든 그네에 앉아줄지는 의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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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본 벌새그네들은 거의 다 벌새들이 쉬면서 망을 볼 수 있는 용도이자, 그 모습을 인간이 관상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용도를 약간 변경하기로 했다. 보태니컬 가든을 돌면서 관찰하다보니, 벌새들이 꽃의 꿀을 빨 때 약간이라도 아래쪽에 의지할 나뭇가지나 꽃이 있으면 그걸 딛고서 꿀을 빠는 걸 볼 수 있었다. 벌새들은 너무나 가볍기에 얇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도 가지가 꺾이지 않았다. 아무리 원기왕성한 벌새라 하더라도 혀를 뻗어 꽃꿀을 빨아먹으면서 동시에 날개를 빨리 저어 공중에 떠 있는 것은 무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착안해서 나는 벌새들이 우리집 피더를 방문할 때 편안히 발을 딛고 날개를 접은 채로 식사할 수 있도록 그네이자 식탁의 용도를 지닌 벌새그네를 만들기로 했다. 물론 여기에 돈은 한푼도 들이지 않았다. 집에 남아도는 꼬치구이용 대나무와 이전에 귀걸이를 만들다가 남은 투명 구슬들과 와이어를 엮어서 대충 만들었다. 벌새피더 바로 앞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네를 걸어둔 다음, 벌새들이 과연 나의 설명 없이도 그네겸 식탁을 올바로 이용해줄지 궁금해하며 부엌유리창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2F2A6527-best.JPG 나의 벌새 '존스노우'가 피더 앞에 걸린 그네를 향해 날아오는 모습


그네를 건 지 3분도 안 되어 존스노우가 나타난 걸로 봐서, 건너편 나뭇가지 속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존스노우는 관찰하듯 천천히 피더를 향해 날아오더니 그네에 착지해서 균형을 잡았다. 이런 그네가 처음이 아닌 건지, 아니면 자연 속에 있는 다른 가지나 물체를 많이 활용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존스노우는 피더의 넥타 구멍과 자기 발과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편안하게 앉아서 넥타를 먹었다. 존스노우가 식사를 마치고 떠난 후 나타난 암컷 레나와 베이비소울도 모두 자연스럽게 그네를 활용했다. 그리고 그네에 매달아둔 투명한 플라스틱 구슬이 꽃인 줄 알고 유심히 살피고 냄새를 맡다가 혀를 내밀어 핥아보기까지 했다.

2F2A6915-g.JPG 그네에 발을 올리고 날개를 접은 채 넥타를 먹는 존스노우
2F2A6547-best-1.jpg 수컷보다 몸이 약간 큰 암컷 레나는 그네를 살짝 뒤로 밀면서 부리를 뻗어 넥타를 먹는다.


빨간 구슬이 의외로 얼마 남지 않아서 이것저것 엮다보니 엉성하기 그지 없었지만, 나의 소박한 벌새들은 그네형 식탁(또는 식탁형 그네)이 마음에 드는지 모두 편히 앉아서 넥타를 먹었다. 내가 만든 넥타를 잘 먹어주는 모습만 봐도 머릿속에서 엔돌핀이 분비되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내가 만든 볼품없는 그네에 앉아 넥타를 먹는 모습을 보니 사랑스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날이 8월 29일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아침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을이 온다는 건, 9월이 온다는 건 벌새들이 남쪽으로 떠날 날이 가까웠다는 뜻이었다. 좀더 빨리 그네를 만들어주었더라면 새들이 일찍부터 편하게 식사를 했을 텐데... 존스노우는 9월 중순이 되어서 떠났으니, 벌새그네를 이용한 날은 고작 보름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착각이었는지 몰라도, 그네가 생긴 후 존스노우는 좀더 나를 자주 바라봐주었던 것 같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존스노우의 눈길은 내게 꿀처럼 달콤했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은 존스노우와 나의 벌새그네를 보니, 존스노우의 생명력 덕분인지 조잡한 구슬들이 진짜 보석마냥 영롱하다.


2F2A6838-best-1.jpg 나와 눈을 맞추는 존스노우


후안 바하몬의 정체와 '허밍버드 사인(Hummingbird Sign)'


후안 바하몬 박사는 내가 페북의 벌새 사진 동호회에 가입한 후 알게 된 에콰도르 출신 벌새 사진가이다. 사진들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진에 덧붙인 설명과 감상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나는 소심하게 그의 사진에 '좋아요'만 누르면서 남미에 사는 다양한 벌새들에 대해, 또 그들을 사진에 담는 기술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마트에 가면 반드시 필리핀산이 아닌 에콰도르산 바나나를 구매했고, 바나나의 맛에서 후안 바하몬이 숨쉬는 공기와 그곳에 사는 벌새들을 상상했다.


그렇게 완벽한 사진을 찍는 분도 매번 벌새 사진 촬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엄지손가락 크기밖에 되지 않는 벌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쉬고 있거나 편안하게 벌새 피더에서 설탕물을 빨고 있는 장면을 찍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지만(내게는 이것도 벅찼다), 실제 자연 환경에서 아름답게 핀 꽃 위에서 날갯짓을 하면서 넥타를 먹고 있는 장면을, 그것도 정면에서 눈동자까지 선명하게 찍기는 정말 어렵다. 스튜디오 촬영이 아니기에 하늘에 구름이 끼어도 큰 영향을 준다. 어쩌다 겨우 완벽한 설정 속에 벌새가 나타났으나 벌새가 등짝만 보이고 있거나 다 시들어빠진 꽃에서 꿀을 먹거나, 교묘하게 꽃 뒤에 숨어서 꿀을 먹어도 안 된다. 끝없는 인내심과 헌신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그 중에서 한두 장의 사진을 건졌을 때의 희열은 크다고 했다.


또한 해당 벌새가 완벽한 햇빛 조명 아래 얼굴을 드러내고 꿀을 먹는 행동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확한 움직임과 표정을 육안으로 포착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초고속 셔터기술을 활용해서 새의 동작을 찍으면서도 새의 눈동자와 얼굴 표정까지 정확히 담아내야 하므로 1천장 찍어야 겨우 1장 건진다는 것이다. 후안은 이 새들의 전투를 'aerial dogfight(공중 개싸움)'으로, 이 새들을 'acrobatic wrestlers(곡예 씨름꾼)'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후안은 그 새들의 동작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를 'freeze the activity on a fraction of time'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freeze는 '얼린다'는 뜻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동작을 고정시키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진 속에서 새 두 마리는 날개로 서로를 붙잡고 드잡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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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취미일 뿐이라고 해서 그의 본업이 궁금했던 나는, 그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서 용기를 내어 페북친구 신청을 했다. 페북 프로필 사진에서 보면 후안 바하몬은 검은 머리에 두꺼운 눈썹, 날카로운 눈동자, 갸름한 얼굴에 카이저 수염을 단, 그래서 어딘가 살바도르 달리 느낌이 나는 미남 청년이었다. 그런 분이 과연 나의 제안을 받아줄지 염려되어 메신저로 간단하게 내 소개와 친구 신청을 한 이유를 밝혔다. 후안 바하몬은 지극히 말을 아끼면서 흔쾌히 친구가 되어주었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분의 페북 친구가 되어 그분의 페북 친구들이 볼 수 있는 개인 사진들과 게시물들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어디에서도 카이저 수염의 살바도르 달리를 닮은 청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용을 보니 손자가 왔었다, 아들이 다녀갔다...뭐 이런 건 있는데 어디에도 후안 바하몬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후좌우 내용들을 통해 추리하다가, 나는 결국 후안 바하몬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는 줄곧 사진들 속에 있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그토록 사모하고 존경하던 사진작가 후안 바하몬은 바로바로 턱선이 사라진 얼굴에 배가 볼록 나온 후덕한 흰머리 할아버지였다. 프로필 사진 속의 청년은 아마 3-40년 전 후안 바하몬인 모양이었다. 그의 아들의 얼굴에서 사진 속 청년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이게 몇 주일씩 고민해서 친구 신청을 보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친구 수락을 기다렸던 노력에 대한 대가였던가! 후안 바하몬이 '지극히 말을 아끼면서' 친구 수락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아...첫사랑을 다시 만나선 안 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페친의 실물도 보려 하면 안 된다.


실망은 잠시, 후안 바하몬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가까이 다가간 보람은 분명히 있었다. 에콰도르의 가난한 집 아들이었던 후안은 고생 끝에 미국으로 넘어가서 어찌어찌하여 신경외과 의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은퇴후에 고국에서 가까운 텍사스 남부에 살면서 벌새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자주 에콰도르를 방문하면서 남미의 다양한 벌새들을 연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자비를 들여 최고급 카메라와 장비를 마련했고, 순수한 취미생활로 전문가 뺨치는 사진을 찍는다. 최근에는 전세계 벌새 사진가들을 모아서 1년에 한번씩 함께 벌새 탐조 및 촬영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신경외과 의사답게 '허밍버드 사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내용인즉, 자기가 다룬 신경외과 환자 중에서 끝없이 넘어지는 증세를 보인 남자 노인이 있었는데, 검사하는 과정에서 후안 바하몬 박사가 가장 우려한 뇌질환인 '허밍버드 사인'이 뇌에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MRI를 찍었을 때 뇌에 나타나는 모양이 마치 허밍버드의 날카로운 부리가 위쪽을 향한 듯한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래 흑백사진이 그것이다. 후안 바하몬 박사는 이 모양에 정확히 일치하게 찍은 벌새 사진을 옆에 대치시켜두었다. 벌새를 끔찍히 사랑하지만, 인간의 뇌 속에 이런 사인이 나타나는 건 죽음의 경고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땐, 후안 바하몬의 친구인 게 너무 영광스러웠다.


허밍버드사인.JPG 허밍버드 사인(왼쪽)과 후안 바하몬이 촬영한 허밍버드 사진(오른쪽)


그 후로도 나는 후안 바하몬 박사가 올리는 허밍버드 사진에 꾸준히 '좋아요'나 '놀라워요'를 누른다. 돈을 모아서 언젠가 그분의 벌새 탐조 촬영 여행에 동참하리라는 야무진 꿈을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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