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 에필로그-
벌새와 헤어진 지 2년이 되어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벌새에 관해 글을 쓸 준비가 되었다. 그 전에는 늘 생각은 하면서도, 벌새와 헤어지던 날의 슬픔을 뒤돌아볼 용기가 없어서 계속 뒤로 미루기만 했다. 한국에 와서 번잡한 도시 한 가운데 정착하여 살다보니 벌새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감수성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러가지 사연으로, 유기된 비글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하여 키우게 되었다. 차 멀미 심한 강아지가 맘 놓고 산책할 수 있는 동네를 고르다가 비교적 자연과 가까운 도시 외곽으로 이사했다. 초록이 가득한 새 동네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던 첫날 너무나 익숙한 나무들이 내 시선을 끌었다. 윈터베리 나무들이었다. 미국 조지아주 에슨스의 내 아파트 뒤뜰에 있던, 나의 벌새 존스노우가 깃들어 살던 윈터베리나무였다.
이사 피로가 풀릴 즈음, 아침 일찍 일어나 창을 열자 깨끗하고 푸르른 공기가 가슴 속으로 들어왔고 벌새에 대한 그리움도 돌아왔다. 이제 벌새와 헤어지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기억이 떠나기 전에 얼른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벌새에 대해 글을 쓰는 시간이 한없이 행복했고, 온전히 홀로 깨어있는 시간과 글 쓰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도 되살아났다.
그렇게 보름 가량 매일 아침 글을 쓰고, 이런 속도라면 한 달 만에 책 한권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외부의 일들이 끼어들었다. 나흘간 지방출장을 다녀왔을 뿐인데 벌새에 대해 몰입할 수 없게 되었고, 글의 리듬과 흐름이 깨졌다. 점점 바빠지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 건강이 상하고 피로감에 절어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없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무려 1년이 지나서야 다시 느리게 숨을 쉬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멀리 날아가버린 듯하던 마음속 벌새가 다시 내게 돌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다시 벌새에 대해 글을 쓰는 행복을 되찾았지만, 이럴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벌새를 돌아봐도 마음이 아프지 않게 되었다는 건 이제 내가 벌새를 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벌새가 내 마음에서 떠나버리면 아무 감흥이 없어서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 대상에 대한 기억을 재빨리 글로 내려놓지 않으면 그 기억조차 나를 떠나버릴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제 진정으로 벌새가 내 마음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건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계속 그 아픔에 대해 말하고 다니다가 몇 년 지나고 나면 그 아픔 자체를 잊어버리고 현실의 삶에 집중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게 인생의 딜레마이지만, 똑같은 원리 때문에 우리는 살면서 겪는 온갖 고통과 아픔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행복한 이에게는 너무 짧게 느껴지고, 불행한 이에게는 너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기에, 시간이 누구 편도 들지 않고 공평하게 흘러야 한다던 워즈워드의 시구처럼.
게다가 벌새를 온전히 추억하며 글을 쓸 수 있는 상태는 '맑고 집중된 마음의 상태'로,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할 때처럼 잡음이 없는 고요한 상태였다. 그런 마음 상태를 만들어 글을 쓰려면 컨디션이 좋고 피로감이 없으며, 다른 일의 간섭이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족이 간섭하지 않는 새벽이나 아침 시간이 좋았고, 그런 아침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마치 벌새와 2년을 함께 했어도, 완벽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처럼.
붙잡을 수 없는 벌새가 내 창 앞에서 붕붕대고 넥타를 먹는 짧은 시간에 온 힘을 다해 벌새의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듯이, 마음의 벌새가 나를 떠나기 전에 나는 어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종류의 글쓰기와 창작행위에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열매가 나무에 달렸다고 해서 바로 딸 수는 없지만, 한창 잘 익었을 때 따지 않으면 낙과하여 먹을 수 없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벌새 존스노우는 아침마다 이렇게 나를 가르치며 어서 쓰라고, 어서 열매를 따라고 부추겼다. 그렇게 따 모은 열매가 오늘 보니 한 광주리에 가득찼다. 이제 가장 맛있을 때 먹을 수 있도록 나눠주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