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 펴 들고 외친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새 잊었는가
2달 만에 브런치 글이다. 올해는 꼭 1주에 한 번씩은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 무성하게 두 달 만에 쓰는 글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사실 2월 한 달 내내 너무 아팠다. 작년에도 느꼈지만, 영국의 2월은 늘 우중충하고 추운 날씨들의 연속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4시만 되면 금방 어두워지는 영국에 비해서는 더 나은 거 같다. 그렇게 가장 우울한 2월의 영국에서 나는 원인 모를 고열과 매쓰꺼움, 부종 등을 경험해야 했다. 그렇지만, 회사는 출근해야 했기에, 약으로 버티다가 가장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2월 중순에 병원에 다녀왔다.
영국의 의료 시스템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GP : 일반의가 진찰하는 영국 보건소의 개념. 반드시 거주지 주변에 있는 GP에 환자등록을 해야 진료가 가능하다. 등록된 GP만 가야 하며, 반드시 미리 예약해야 한다.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1년까지의 대기 시간이 발생한다.
* Walk-in Centre : 급하게 병원을 가야 한다면 walk-in 센터에 당일 방문할 수 있다. 무비자 단기 유학생, 관광객도 이용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도 대기 시간이 굉장히 길다.
* A&E : Accident and Emergency Department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응급한 상황에 갈 수 있는 응급실이다. 워크인보다는 조금 빠르지만, 여전히 대기 시간이 있다.
* Private : 개인병원. 여기서의 진료는 무료가 아니며, 모든 비용은 본인이 내야 하는데, 비용은 굉장히 비싼 편이다.
나는 이 4가지 선택지 중에, A&E로 향했고 진료부터 의사 소견까지 총 8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Flu의 증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계속 Flu라고 의견을 개진하며 그저 Boots(영국의 Drug store)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기약 하나를 고작 처방해 줬을 뿐이었다.. (처방해 준 약은 구매하지 않았다.)
이렇게 영국에서는 아프면 고생이다. 등록한 GP를 바로 갈 수 없고 거주지 근처 큰 병원에 간다고 해도 제대로 된 처방을 받기 힘들다. 이번 경험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동일한 경험을 했기에 아마 모든 사람들이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영국 왕립의료학교 RCEM에 따르면 응급처치 지연으로 사망하는 환자의 수가 매주 300~500명가량 된다고 한다. 치료나 수술을 바라는, 대기 중인 환자는 작년 23년 10월 기준으로 775만 명에 달했다. 지난 10년 전에 비해 무료 3배 넘게 증가한 수치이다. 지난 1월 3일 영국 전공의 (Junior Doctor)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6일 간 파업에 돌입했다. 전공의 초임 임금은 시간당 15파운드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질 임금은 15년 전보다 26%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대폭 증가한 의료 수요에 비해 인력 충원은 난항을 겪고 있다. 2021년 영국 건강 재단 보고서에 따르면 NHS 부족 인력은 약 9만 4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폭발적인 수요에 비해 공급은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으니, 의료 서비스의 질과 신속성은 전혀 충족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의료보험에만 가입되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의료 선진국 우리나라도 빨간불이 켜졌다. 올 상반기에 정부의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 발표로 의료계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러한 결정에 정부는 우리나라 의사 부족 상황과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사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어느정도는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할많하않..) 그러나 의협을 중심으로 하는 의료계는 의사 부족의 문제를 '전체 정원 수'가 아닌 부족현상이 발생하는 '구조'로 시각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나라의 의료접근성은 원만한 수준으로, 대형 병원의 '병상 대비 의사 수'가 부족하거나 지역이나 필수 의료 영역에 대한 기피 현상이 문제의 본질이기에 지역 의료, 필수 의료에 대한 보상을 늘리고 의료 사고에 따른 법적 분쟁 부담 문제 또한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채 2024년 2월 25일부터 정부의 발표에 반발한 전국 병원의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집단적으로 병원을 이탈하여 전국적인 의료대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까지도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으며, 정부는 3월 20일 오늘부터 의대 2000명을 배정하였으며, 여전히 전공의들은 사직하고 해외여행을 가거나,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장기적인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전공의들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면서 제 시간에 응급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가 사망하는 등 의료 공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런 사태를 뉴스나 라디오로 접하면서 영국의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는 나에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전세계 국가들 중에 한국의 의료 수준은 타 국가에서도 받고 싶을 정도로 상위권에 위치한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땐 영국에서 묵혀왔던(?) 속병들을 한국에 있는 기간 동안 한꺼번에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새삼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자부심마저 느꼈던 나였다..
‘국가는 왜 실패 하는가’ 저자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경제적 가치를 약탈하는 착취적인 국가와 불공정한 사회는 반드시 실패 한다’고 했다. 해당 정책이 가져올 부작용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 없이, 무책임하게 끌고 나가는 정부나 밥그릇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환자의 생명을 보고도 모른 채 하는 의사나 잘잘못 따질 것 없이 둘다 큰 잘못이다. 그래서,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명분만 좋은, 질 낮은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의 NHS 서비스를 따라가고 싶은 걸까. 대한민국 전공의는 의사가 되기 전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가장 첫째로 생각 한다.' 등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은 걸까.
세계 의료인들도 임금인상을 놓고 파업은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밥그릇'을 놓고 파업하는 나라는 없다.
어떠한 결정이든 간에 상반된 두 의견을 좁혀 더 이상 고통 받는 환자들이 없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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