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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니 Jun 18. 2019

독립적으로 사고하기

독립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지성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이야기하는 아이템이다. 기존 이론에 대한 의심, 투자결정의 독립성 등등 학계든 금융투자든간에 자기의심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서쪽에는 지옥이 있다라는 생각에 대한 의심이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해냈고, 스페인과 영국을 세계제국으로 이끌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독립적인 사고는 우리의 유전자상 쉽지 않은일인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왜 우리는 독립적 사고가 힘든가


요새 드라마중에 아스달 연대기인지 하는 작품이 있는데, 앞에 두편정도 보고 심히 실망하여 더이상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경쟁구도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승리한 것은 실제로도 그렇고,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개별적 존재로만 보면 네안데르탈인은 가장 강력했다. 지능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으며 육체적으로도 강력했다.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런데 호모사피엔스와의 경쟁에 밀려 멸종해버린 것이다. 왜?  개별개체의 힘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유한하며, 집단의 힘은 개체가 아무리 약하다 하더라도 병렬성이 존재해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은 뛰어난 능력 대신 많은 기본에너지를 소모하므로 큰 사냥감이 없으면 도태될 수 밖에 없다.  호모사피엔스는 개별 개체는 약하지만, 에너지 소모도 적다. 하지만 집단이 커지면 큰 사냥감도 사냥할 수 있으며, 큰 사냥감이 사라지더라도 여럿이 다수의 사냥감을 동시에 사냥하기에 최적화 되어있다. 그게 전부다. 네안데르탈인은 집단이 커지더라도 작은 사냥감을 사냥하기에는 너무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빙하기가 와 큰동물들이 없어지니, 쥐라도 먹고 살았던 사피엔스형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개별 개체의 생존은 나와 세상과의 싸움이지만, 집단의 생존에서는 집단과 세상, 그리고 나와 집단의 싸움이 된다. 호모사피엔스는 그렇게 "나와 집단의 싸움" 에서 진화되어 왔기 때문에, "감정" 이라는 현대사회에서 어찌보면 쓸데없는 유전자를 생존시키게 된다. 공동체에 잘 융화되는 호모사피엔스 개체만이 그 집단에서 좋은 위치를 가질 확률이 높아지며 배우자를 얻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들은 고대사회에 존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며 수천년간 열성유전자로서 숨어지내왔던 것이다. 우리의 행복감을 높여주는 감정중에 가장 큰 것은 "공감" 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공감능력" 에 빠져드는 것은 이러한 유전자의 영향이 아닐 수 없다. 중년을 지난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타인의 "공감" 이나 "인정" 등의 정말 비 경제학적인 감성에 휘둘리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공감능력의 필수성이야말로 고대와 중세사회를 이끄는 힘이었고, 가정과 평화 그리고 종교를 지켜왔던 일등공신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나친 공감에 대한 강요가 암흑시대이며 인류문명의 퇴보를 가져온 중세를 만들어냈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공감능력이 집단내의 행복을 극대화시키기는 하지만, 개인의 독립적인 사고는 철저히 억누르게 되며, 이를통해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위대한 정신승리까지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래 5천년이라는 시간은 30년에 한번씩정도로만 일어나는 유전자결합이 많은 유전자를 대체하기에는 턱없는 시간이다. 고작해야 170번정도 섞인 수준이다. 일반적인 진화는 약 10만년에 걸쳐 일어나더라도 큰 턱이 작아지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10년마다 완전히 격변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아직 100만년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공감해야한다.


현대에는 왜 소시오패스가 더 자주 등장하고, 더 자주 성공하는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선이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 공산주의의 선은 자본의 크기가 아니라 자본이 얼마나 공평하게 분배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므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라는 공식에 빠져들지는 않도록 하자. 


소시오패스를 정의하자면 그냥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공감능력의 부재는 사람들과의 괴리감을 일으키지만, 이것이 논리와 결합하면 지나칠정도의 이성이 된다. 소시오패스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욕심과 공포가 그다지 없다. 남들이 끔찍하다고 해도, 그것을 이성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경제적 효익이란 논리의 집합체이다, 자본주의는 그것을 극대화하는 이념이고 소시오패스에게 자본주의는 꿈과같은 세상인 것이다. 소시오패스에게 공산주의란 비논리적인 것이다. 사실 공산주의가 가능하려면 완벽한 인공지능 (또는 신) 이 세상을 다스려야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배분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경제적 효익을 극대화하는 결정이 대접받는 세상. 그것이 소시오패스가 가장 원하는 세상이다. 


따라서 산업혁명이후 가속화된 자본화 속에서 소위 거대 재벌들이라는, 좋게이야기하면 논리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한 사람들, 나쁘게 이야기하면 공감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들이 아픈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집단에서의 생존률을 비약적으로 올려버린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유한 자본의 크기가 크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해도 후손을 남길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1800년대 이후 200여년간 이러한 소시오패스들은 사회에서 엄청난 성공을 이룩해냈다. 그리고 애도 많이 낳았고. 앞으로는 이런 경향이 더욱더 심화될 것이다.


1980년대, 아직 공동체의식이 많았던 한국사람들이 이성과 개인주의로 가득찬 서양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2019년 오늘을 사는 현재의 한국인들은 이성과 개인주의가 금과옥조가 되었다. 그것이 생존률을 더 높인다는 것을 보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IMF 와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겪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생존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공감능력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허준호씨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한 말이 그것이다 "아무도 믿지말고 너만 믿어". 믿음의 다른말이 깊은 공감이다.


아무도 믿지말고 자신만 믿는 것이 독립적 사고의 시작


 독립적인 사고는 어이없게도, 이런 "불신" 에서 시작한다. 내가 보고있는 것, 당연시되고 있는것에 대한 의심. 그리고 그 의심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독립적 사고" 인 것이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다기보다는,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것인가?" 라는 의심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요하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면, 왜 떨어지는 것인가.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결국 그 때 까지 존재하던 "세상의 공식" 을 깰 수밖에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던 그 공식이 사과하나를 시작으로 처참히 무너지고 과학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한다. 이러한 발견들은 그 이후에도 몇십년에 한번씩 세상을 계속 흔들었으며, 많은 반대와 욕설또한 그대로 반복되었다. 모두가 믿는데 왜 너만 안믿냐고, 레퍼토리도 똑같다. 


산업혁명이후 자수성가로 거대한 부를 쌓은 사업가나 투자자들또한 공통점을 찾자면 "그들은 Contrarian" 이다. 대중과 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한국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때도 반대가 훨씬 많았고,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개발한다 할 때도 반대가 훨씬 많았다. 이건희씨나 박정희씨가 "음 다들 반대하지 하지말아야겠구먼" 하는 공감능력을 보여줬다면, 조직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망했겠지. 스티브잡스씨가 워즈니악씨와 공감했다면 애플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워즈니악씨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집단지성의 시대에 이런말 하면 욕먹겠지만, 집단지성이란 "여태까지는 이렇게 생각해왔어요" 정도의 의미만을 가진다. 요새 다시 유행하는 머신러닝 또한 Interpolation 이지 Extrapolation 이 아니다. 


세상과 다른길을 가려면, 그 세상을 의심해야 한다. 성격이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다. 위대한 기업가들이 괜히 "내가 뻘짓함에도 참고 기다려준 부인과 가족" 을 지나치게 강조하는게 그 때문이다. 사실 가족도 이해못한다, 그나마 가족이니까 참고 기다려줄 수나 있는 것이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사람은 굉장히 불행해진다. 그래서 본인이 옳았음을 증명하기위해 계속 외부와 싸우게 되고, 결국 대개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기 마련이다. 예술가들이 괜히 우울한게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는 아직 100만년전 공감능력에 최적화된 호모사피엔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 사고를 하고 싶다면


소시오패스로 태어나지 못했거나 개인적인 불행을 감수하고라도 독립적 사고를 하고싶다면, 가장 쉬운방법이 있다. 정보나 사실을 얻을 때 "아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는 대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라고 일단 생각하고 처리하면 된다. 예를 들어 "1 더하기 2는 3" 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 그들은 1더하기 2가 3이라고 생각하는군"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수학적으로 1더하기2가 3이 될 필요는 없다. ordinality 만 바꾸면 1+2=4 도 될 수 있다. 상식적으로 ordinality 는 전제에 깔린 것 아니냐 하면, 당신은 독립적인 사고를 할 준비가 안된 것이다. 게다가 더하기의 정의가 무엇이냐 라고 다시 생각해 보면 좀 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 내가 써놨지만 비약이 심하기는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나의 유전자를 습관으로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의 다음단계가 더 중요하다. 본인의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런 의심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대개 엄청난 노력과 희생의 줄기찬 향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되었을 때 당신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사람이 된다. 물론 다른사람들은 공감해주지 않겠지만. 심지어 독립적인 사고를 해야한다고 가르쳐주던 스승들도 "넌 왜 자꾸 딴지를 거니" 라고 공감능력을 강요하게 될 수도있다. 그게 우리의 유전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스승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라면서.


마지막으로 당의정이 필요하다. 당의정이란 쓴 약을 겉에만 달달하게 만들어서 먹기 쉽게 만든 약이다. 몸에는 좋은데 너무 써서 불행한 "몸에 좋은 쓴 약". 고수들은 달달하게 만들어준다. 달달하게 만들어서 꿈을 이루면 된다. 몸에 안좋은 쓴 약을 달게만 만들면 사기꾼이 되고, 몸에 좋은 쓴 약을 달달하게 만들면 위인이 된다. 아니면 위대한 정신승리자 갈릴레이처럼 살아도 좋고. 


그리고 왕따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호모사피엔스 100만년역사중에 공동체의식이 약해진 것은 불과 200년밖에 되지 않는다. 독립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100만년에 걸쳐 성공적으로 인류를 생존시킨 공동체의식이라는 막강한 도구를 의심하는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왕따가 된다. 우리가 아는 많은 예술가들은 대개 왕따였고, 과학자들도 왕따였으며, 기업가들도 왕따였다. 심지어 정치인들도 그런사람들은 왕따였다. 게다가 그들이 옳았음에도 욕만 바가지로먹으면서 죽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다 죽고 나니까 "아 생각해보니까 걔가 맞았네, 웬지 미안하기는 하지만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그냥 왕따시켜야지"  라는 식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당신의 생각에 가장 맹렬하게 반대하는 반대편의 수장들이 보통은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도 소시오패스기 때문에. 다만 진실을 향한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본인의 위치를 향한 소시오패스인 것이 차이일 뿐이다. 그 또한 독립적인 사고로 당신을 적대하는 것이다. 1~2년 왕따당하는게 아니라, 30~40년 왕따 당하는 것을 상상해보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수십년전 아는 음악가가 "나는 삼류에로영화 감독도 존경한다. 창조라는 것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라고 했던 적이 있다. 독립적인 사고는 일종의 창조과정이다. 파괴를 통한 창조가 있고, 무에서 만들어나가는 창조 또한 있다. 우리는 대부분 1000만명에 한명있을까말까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천재가 아니므로, 대개의 경우에는 파괴를 통한 창조를 수행한다. 그에 의해 파괴되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당신은 욕먹고 음해당하며 왕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사고는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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