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학, 그 첫 번째 시련과 성장
눈물의 연속이었다. 매일매일이 괴롭고 혼자 남겨진 것 같아 괴로웠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 투성이의 공간 속에서 눈치로 살아가야 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기대고 싶지만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이제 겨우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접어든 시기 었는데 그때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노키아 흑백 폰 하나였다. 얼마 없는 크레딧으로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내 목이매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3개월 동안은 하루도 빠짐없이 울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났다. 뭐가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냥 익숙하지 않은 상황과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패닉이었다. 내 삶에서 어쩌면 가장 처음으로 철이든 시기가 아마도 이때쯤이었으리라.
때는 2003년, 중학교 2학년이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홍콩에서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가 오빠에게 중국 유학을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은 오빠는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는 중국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2년에 한 번씩 홍콩, 상해, 계림 등 중국에서 유명한 관광지로 가족여행을 가곤 했다. 그때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처음 가봤었는데, 이렇게 큰 세상이 존재하는구나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큰 세상에서 살아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홍콩에서 사업을 하시면서 미래 중국의 가능성을 생각해 두신 아버지가 오빠에게 중국 유학을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오빠는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기에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혹시 내가 가면 안돼요?”
지금 내 성격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거다 싶으면 바로 밀어붙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뭐든지 하고 싶으면 당장 한다. 생각나는 데로 실천에 옮겼고 아니다 싶으면 포기도 빠르다. 그냥 중국에서 유학한다는 게 어쩌면 재밌어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딸이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승낙을 했다. 다음날로 나는 엄마와 함께 정들었던 중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이상했다. 모두가 교복을 입었는데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고, 더 이상 내가 몇 년간 속해 있던 곳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은 중학교 3학년 반배정이 있는 날이었는데, 나는 3학년 9반에 배정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배정이었다. 친구들은 서로 같은 반이 되었다며 좋아하고 다른 반이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때 알았다. 함께 나눌 수 없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홍콩으로 날아갔다. 비행기에 타기 직전까지 엄마가 공항 출국장에서 손을 흔들을 때까지 사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잘 다녀올게! 하고 씩씩하게 배낭을 메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를 타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스르륵 비행기가 뒤로 밀려났다. 하늘을 무척 파랬다.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서서히 실감이 났다. '아.. 이제 진짜 혼자구나..' 4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두 팔로 안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꾸역꾸역 흐르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이를 악물었다. 내가 선택한 거니깐.
공항에는 아빠가 마중을 나왔다. 아빠 얼굴을 봤는데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는 공항버스를 타고 중국 국경을 향해 달려갔다. 오른쪽 차로가 아닌 왼쪽 차로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의 야자수를 바라보며 자꾸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아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내 아빠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주고 묵묵히 옆에 있었다. 아빠에게 미안했다.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지만 처음 느껴보는 슬픈 감정을 숨길수 있을만한 능력은 아직 어린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중국 광둥 성에 있는 한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공부하던 학교는 중국에서 청일전쟁 때 마약을 모아 태워 버렸던 아편전쟁이 난 후먼이라는 곳에 있었다. 동방의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기숙학교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국제부까지 학생수만 수 만 명에 육박했다. 잔디가 깔린 커다란 운동장이 여러 곳이고 천문대, 영화관, 레스토랑 등 없는 게 없었다. 기숙사 방에는 총 6명이 살았는데 대만, 홍콩, 중국애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침대는 나란히 붙어 있었고 나는 창가 옆에 작은 침대를 배정받았다. 화장실이 방 안에 있었는데 사람 두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공간에 아이들은 칸을 나눠서 각자 자기의 용품을 보관했다.
비교적 비싼 학비를 내야 하기 때문에 집안 사정이 여유로운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겠지만, 내가 만난 학생들은 모두 착하고 순수했다. 웃음이 많았고 호기심이 많았다. 내가 학교에 처음 간 날 내 방과 학교 교실로 정말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던 일은 잊을 수 없다.
나는 ‘니하오’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중국 아이들과 중국어를 익혔고, 아침에 학교에 가면 어문 책을 거꾸로 들고 논어를 달달 외웠다. 지금까지도 내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소리 내어 읽으며 외웠던 논어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배우기 시작한 중국어는 3개월이 되니깐 대충 주변 아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구나를 알 수 있었고 6개월이 되니깐 곧잘 말을 하며 수업을 따라갈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엄마 품을 떠나 외롭게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한 달에 한두 번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어린 나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엄마는 반갑게 맞아주다가도 이내 목이 잠겼다. 나 역시도 씩씩하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다가도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하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도 하고, 수업을 빠지고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정말 엉엉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렇게 서글펐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들도 너무 보고 싶었다.
아빠는 국제학교가 아닌 로컬을 선택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유학 오는 많은 한국인 학생들은 국제학교에서 외국인들끼리 수업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아빠는 중국에 왔으면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아빠는 나에게 한 번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항상 고민하고 생각 한 뒤에 나에게 제안을 했다. 그런 제안을 받으면 대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아빠의 설득의 교육법이었다.
어렸을 때 아빠가 외국으로 갔기에, 아빠와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중국 유학은 그런 점에서 아빠와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나 부모님이 생각날 때면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 당시 스마트폰이 아니었기에 문자나 카톡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오직 국제 전화만 가능했다. 그랬기에 가장 쉽게 전화할 수 있는 상대는 아빠였다.
아빠와 통화를 하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 내 생각, 내 고민을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중국어를 배우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징그럽게 더운 날씨, 한국에 가지 못하는 모든 일들이 그 당시 참 서러웠다. 그럼 이내 눈물이 나고 아빠에게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해? 라는 말을 하기 일수였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지은아, 날씨가 매일매일 똑같지 않지? 비바람이 몰아칠 때가 있으면 햇볕이 밝게 빛 날 때가 있는 법이란다, 우리네 인생도 힘들 때가 있으면 기쁠 때가 있으니 지금 힘든 것도 조만간 지나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슬픔도 즐거움도 모두 최선을 다해서 즐겨야 한다”
아빠의 이 말씀은 지금 내 인생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슬픔이 삶으로 밀려와도, 행운이 찾아와 기쁨으로 가득 찰 때도 언제나 이 또한 바람처럼, 구름처럼 지나가리라는 것을 가슴에 새긴다면, 그 어떤 삶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중국 유학을 선택했던 일은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이다. 나는 청소년기를 중국에서 보내며 힘듦을 극복하는 스스로의 방법을 참 많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많은 만큼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내 지나갔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니 말이다. 그때의 감정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남아 있지만, 이젠 더 이상 힘들지 않다. 그저 소중한 추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