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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리 Jul 15. 2018

내가 와인 세계에 입문했던 법

포장하며 배운 와인 

이력서를 넣은 와인 매장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면접을 봤고 바로 합격을 했다. 알고 보니 이 회사는 알자스에서 가장 큰 와인 소매 전문점으로 레스토랑과 와인바를 함께 경영하고 있었다. 회사의 사장인 이자벨은 프랑스 내에서는 와인을 선택하는 데는 일가견 있는 뛰어난 미각을 가진 여자로 정평이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회사에서 나를 뽑은 이유는, 일단 여러 가지 언어 구사가 첫 번째였다. 당시 스트라스부르에는 일본인과 독일인 관광객이 많았는데, 내가 이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활기찬 인상을 주었다고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나는 이렇게 와인 전문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가끔 수업 때문에 일하는 시간을 조절해야 했는데, 내가 일하던 매장의 매니저였던 클로드와 프랑수아즈는 대학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나와 함께 조절해 가며 최대한 배려해 주었다. 나는 학교를 병행하면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 반까지 일을 했다. 사실 그 당시 스트라스부르에는 기숙사가 있었고, 콜마르에는 집이 있었는데, 어쩔 때는 집에서 4시 반에 일어나서 차를 끌고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일을 하다가 오후에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다시 일을 하러 갔다. 일이 끝나면 녹초가 돼서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또한 그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시내에서는 트람을 운영하지 않아 일일이 기차역까지 걸어 다녀야 했다. 몸은 무척이나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일이 재밌고 와인 배우는 게 신이 나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일했던 곳에는, 20년 이상 매장을 지킨 클로드와 프랑수아즈가 있었고, 소믈리에 과정을 준비 중인 인턴 한 명 나, 그리고 소믈리에 과정을 이수하고 가끔 와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돕는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하는 일은 간단했다. 어제 판매되어 비어있는 진열장에 똑같은 와인을 가져다 채우고, 새로 와인이 들어오면 카브에 차곡차곡 정리를 하고, 수량 체크를 했다. 큰 주문이 들어오면, 주문에 맞게 와인을 포장하는 일도 했다. 


와인이 한병 나가고 나면, 그 와인의 빈자리를 같은 와인으로 채워야 했다. 그럼 나는 와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카브에 내려가서 같은 와인을 찾아와야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름을 읽는 법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랐던지라 처음에 한일은 그곳에 있는 모든 와인과 와인 생산지역 이름, 아펠라시옹 이름, 빈티지, 생산자 이름 등을 머릿속에 입력시키는 일이었다. 와인뿐만 아니라 럼, 위스키, 진, 주정강화, 포르토 등 온갖 술이 있었고 그 종류는 3천 가지가 넘었다.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가 카브에 가서 똑같은 와인을 찾기도 하고, 포스트잇에, 손바닥에 적기도 했다. 분명 외운 거 같았는데  카브에만 가면 까먹어서 다시 되돌아 오기를 반복했다. 또 와인을 제대로 가지고 온 줄 알았는데 빈티지를 보지 않아서 2015년 산을 2005년 산을 가지고 오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 서부 루아르 밸리 와인 Muscadet와 알자스 Muscat를 헷갈려하기도 했고, 부르고뉴 와인  Pouilly fuissé 와 루아르 밸리 와인 pouilly fumé 를 같은 걸로 착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행운이었던 것은, 모르는 것에 대해 관대했던 매니저를 만난 것이었다. 나는 모르는 모든 것을 물어봤다. 시간이 날 때마다 물어봤고, 손님한테도 물어보고, 테스팅을 하러 오는 생산자를 붙들고 질문을 했다. 사실 부끄럽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몰랐고, 엉뚱했고, 사람들에게 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예뻐 보였는지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기가 아는 와인 상식, 지식을 나에게 전달해주려고 했고 나는 스펀지처럼 그것들을 내 것으로 빨아드렸다.


매일 같이 와인을 마셨고, 새로운 와인을 테스팅했으며 위스키, 럼의 세계에도 빠져 들었다. 집에 갈 때 항상 와인 한 병을 가져가 요리한 음식과 함께 먹어보았고 틈틈이 와인 생산자에 대한 조사를 하고 공부를 했다. 소믈리에 준비를 하던 인턴 동료는 매일 책을 들고 점심때마다 공부를 했고, 나는 질문을 하고 그 친구가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서로 도와주며 배워 나갔다. (그 친구는 매장에서의 인턴이 끝난 뒤에 정식으로 소믈리에 시험에 합격해 소믈리에가 되었다.)


와인에 관한 지식 이외에도, 문화적인 것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프랑스 와인 애호가들은 어떤 와인을 어떤 식사에 좋아하는지,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구입하는지, 선물용으로는 무슨 와인을 좋아하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와인을 구매하러 왔다가 가끔 시간을 내 매장에 앉아 커피 한잔 하다 보면 그들의 인생 프랑스 인들의 생각과 가치관, 와인에 대한 애정 등을 직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매니저 프랑수아즈는 단골이 올 때마다 나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소개 멘트는 항상 같았는데, "이 친구는 한국에서 와서 한국어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를 해요, 그리고 앞으로 중국에다가 우리 프랑스의 와인을 판매할 크게 될 친구죠. 당신들이 앞으로 많이 도와줘야 해요"였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새로운 손님이 단골이 올 때마다 이야기해서 나중에 내가 매장을 그만두고 나서 단골들이 가끔 그 한국인 여자애 어떻게 됐어? 라며 내 안부를 묻는다고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손님 중에는 실제로 나중에 나랑 같이 일을 하고 사업계획서를 점검해주고 투자 확보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해준 분도 있었다. 


또한 그때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된 한 생산자는 후에 내가 처음 와인을 구입해서 중국 시장에 판매했을 때 가장 먼저 선택한 생산자 이기도 했다. 


그렇게 와인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생산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스토리를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한 번은 그런 일도 기억이 난다. 매장에 오던 최고 단골손님 한 명이 오늘 저녁에 마실 거라면서 Didier dagueneau의 Pouilly Fumeé Silex를 사 가지고 갔다. 나는 잘 모르는 생산자였기 때문에 바로 그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루아르 밸리의 야생마라고 불리는 최고의 생산자 중에 한 명이었는데, 땅을 사랑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최고로 여겼으며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으로 와인을 생산했다고 한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사진으로 그의 히피적인 스타일과 와인 철학에 대한 글을 보고 매료되었다. 하지만 2008년에 그는 비행기 사고로 명을 다했고, 지금은 그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와인 생산을 한다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는 문득 이 사람이 만든 2008년도 이전의 와인들을 꼭 한번 마셔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내가 일하던 곳에서 디디에 다그노가 만들었던 와인은 모두 판매됐고, 그의 아들 벤자민이 만든 와인만 남아 있다고 했다. 그날 나는 왠지 모르게 너무 우울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우울하게 디디에 다그노를 생각하면서 보냈던 기억이 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왜 그렇게 마음이 가는 걸까?) 


또 한 번은 어떤 벨기에 손님이 로마네 콩티를 주문했는데, 우리 매장에는 없어서 조금 떨어진 시내 중심에 있던 다른 매장 와인 심부름을 나갔다. 그 비싸다는 로마네 콩티를 봉투 안에 들고 덜렁덜렁 오는데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한 달 알바 비용이 이 와인 한잔 값도 안 나온다고 생각하니 나는 공기보다 못한 존재인가 하는 존재의 의심까지도 들었다. 그러면서, 대체 와인의 가격은 무엇이 결정하는지, 품질은 무엇이 기준인지, 똑같이 부르고뉴에서 나온 피노누아가 왜 어떤 것은 10유로 어떤 것은 1000유로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덜렁덜렁 와인을 들고 오다 행여나 관광객이 쳐서 와인에 손상이 갈까 나중에는 품에 고이 모셔 매장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나는 매일매일을 와인에 대한 생각으로 보냈다. 또 기본적인 지식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채워 나갔다. 프랑스 와인 생산지역은 어디가 있고, 어떤 생산지 명칭을 사용하고 그곳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유명한 생산자들은 누구고 좋은 빈티지는 어떤 것인지. 와인 유통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고 세금은 얼마인지. 보통 사람들이 편안하게 식사를 위해 지불하는 와인 가격은 얼마이고, 선물을 하거나 특별한 날을 위해 구매하는 와인은 뭔지 가격대는 어떤지를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와인 테스팅도 얼추 하고 나서는, 손님에게 와인을 직접 추천해주기도 했다. 직접적인 판매를 경험하면서, 내가 부족한 부분이 어딘지 어떤 것을 더 보충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일하던 매장에서 무척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포장의 디테일이었다. 크리스마스 기간인지라 평소보다 선물용으로 와인이 많이 나갔는데, 대부분의 손님들이 포장을 원했다. 매니저 프랑수아즈는 포장에 무척 공을 들였고, 포장법을 진지하게 알려주었는데 동그란 박스, 네모난 박스, 끈의 색깔 위스키 포장법, 가격 별로 종이를 고르는 법, 리본 매듭을 매는 법, 종류가 다양한 유광 무광 스카치테이프를 적재적소에 알맞게 사용하는 법 등 매우 디테일했다. 조금이라도 포장이 삐뚤어지거나 테이프가 삐져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포장해야 했다. 그런 모습들을 손님 앞에서 가감 없이 보여줬다. 가끔은 괜찮다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는 손님들도, 정작 완벽하게 포장된 선물을 보면 엄지를 높게 치켜들곤 했다. 바로 그런 디테일과 세심함의 서비스가 수십 년째 이 곳을 단골 위주 장사로 이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프랑수아즈와 클로드는 모든 단골 고객의 정보, 경조사, 와인 취향, 직업 등 다양한 부분을 다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어떤 와인을 찾는지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꼭 신상품이 나오면 이야기해 줘야 한다 했다. 건너 건너 들은 소식으로 이 손님은 얼마 전에 집안에 초상이 났으니 좀 더 담담하지만 밝게 대하라는 세심한 조언까지도 했다. 어떤 손님은 시각 장애인이었는데, 위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매번 올 때마다 나는 위스키를 잔에 담아서 그분 손에 쥐어주고 향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럼 그분은 눈을 감고, 내가 들려주는 비가 온 뒤 젖은 낙엽의 향기, 아침 이슬이 내려앉은 숲의 차가운 공기 등 다양한 표현 속 마법 같은 이야기 속으로 손님을 인도하곤 했다. 모든 손님들은 이 곳에 와서 적재적소에 필요로 하는 와인을 찾을 수 있었고, 단골들은 주변에 와인을 판매하는 수많은 매장이 있어도, 이 곳의 서비스를 보고 찾아왔다. 진정한 고객 중심의 마케팅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일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와인 공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맛의 이해, 네트워크 형성, 일의 즐거움, 넉넉했던 보수 등 뭐하나 빼놓을 것 없이 완벽했었다. 그렇게 나는 와인이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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